2026. March + April Vol. 195
DEFENSE IN NUMBERS

첫 번째 이야기 1970년대:
시작의 시간, 가능성을 묻다

정리. 편집실   일러스트. 챗GPT

첫 번째 이야기 1970년대:
시작의 시간, 가능성을 묻다

1970년대 한국은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동시에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의 초기 연구원들은 열악한 환경에도 사명감 하나로 기술 기반을 쌓아 올렸지요. 그들의 고독한 실험과 반복되는 실패, 그리고 끝내 도달한 작은 성공의 순간순간을 따라가며, 오늘의 기술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담담히 비춰봅니다.

국방과학연구소 56년 여정의 좌표를 소설로 읽다

도면도 없이 40일 만에 병기를 복제해낸 ‘번개사업’의 긴박한 순간부터 한국군 독자 정찰위성 425위성을 탄생시키기까지, 지난 56년의 눈물겨운 사투를 소설로 만납니다. 국방과학연구소 56주년 연재소설 ‘숫자 너머의 이야기’는 시대를 빠르게 읽어 내는 눈으로 누구보다 앞서 자주국방의 길을 개척해 온 선구자들의 숭고한 여정을 기록합니다. 과거의 유산으로 미래의 평화를 일구는 이들에게 바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1 불이 꺼지지 않는 홍릉에서

1970년 8월 서울. 여느 때처럼 습하고 뜨거운 공기가 살갗을 파고든다. 동대문구 홍릉의 울창한 숲을 헤치고 들어서면 건물 한편에 ‘홍릉기계공업회사’라는 투박한 간판이 걸려 있는 게 보인다. 건물을 드나드는 이들은 모두 안다. 이곳이 그저 평범한 기계 공장이 아니란 사실을.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연구원 민준은 굳게 닫힌 출입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젊은 연구원들이 낯선 장비를 앞에 두고 씨름하는 모습이 펼쳐진다. 건물의 정체는 이제 막 출범한 국방과학연구소다.
“자네, 우리가 여기에 모인 이유는 알 테지.”
소장실에서 만난 한 소장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의 결연함에 압도된 민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국가의 군대가 남의 나라 무기를 빌려 쓰고 있다는 것. 이 불편한 현실이 그의 초조한 발걸음을 이곳까지 이끌었기 때문이다.
“우리 군이 미군 체형에 맞춰 제조한 무기를 들고 싸운다는 게 말이 되는가. 총이든 수류탄이든, 우리 몸에 맞는 걸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하네.”
“네, 잘 압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민준의 말끝은 짧았지만, 한 소장은 그의 목소리에 실린 책임감을 알아차렸다. 한 소장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창밖에 어른거리는 홍릉 숲을 바라보았다.

#2 한강 백사장에서 수없이 이어졌던 자갈 던지기

1971년 7월의 일요일 아침, 한강 백사장. 연구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손에는 무게가 서로 다른 자갈 여러 개가 들린 채다. 지나가는 시민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병참물자개발실장 김 박사가 이 자리에 모인 소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 각자 자갈을 힘껏 던져 보시오. 가장 멀리 나가는 게 몇 그램짜리인지 확인하는 겁니다.”
소원들은 이른 아침부터 어깨가 뻐근해질 때까지 자갈을 던졌다. 수백 번 투척한 끝에 결론이 나왔다. 380g짜리 자갈이 가장 멀리 날아갔다. 이어서 하사관학교 훈련생들을 동원해 모양별로 모의 수류탄을 던져보았다.
“사과형이 고구마형보다 5m는 더 나갑니다!”
“10m 차이 나는 것도 있었소!”
소원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한 박사는 측정 결과를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됐어요. 380g, 사과형.”
민준은 수첩에 숫자를 꾹꾹 눌러 적었다. 연구소가 출범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한국군의 손에 맞는 수류탄이 탄생을 앞두고 있었다.

#3 번개처럼 빠르고 눈부시게

1971년 늦가을, 홍릉. 대통령의 명령이 내려왔다. 수류탄 연구의 결과물이 정리될 무렵, 더 거대한 임무가 떨어진 것이다.
“12월 말까지 소총, 박격포, 로켓포의 국산 시제품을 완성하라.”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도면도, 변변한 공구도 없는 상황에서 무기를 복제해 내라는 명령은 소원들에게는 날벼락과 같았다.
“우리는 지금 전쟁을 시작한 셈이네. 총성은 없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혹독한 전쟁이지.”
한 소장의 말이 연구실 벽을 타고 울렸다. 민준과 소원들의 앞에는 미군에게서 빌려온 카빈 소총과 M1 소총이 분해된 채 흩어져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자산은 육안 관찰, 비파괴 검사, 그리고 밤샘을 버텨낼 체력뿐이었다. 연구소의 불빛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총열을 깎을 장비가 없어 대전의 한 금속 회사가 보유한 ‘브로칭 머신’ 한 대에 매달렸다. 청계천 부품 상가를 뒤져 미사일 회로에 쓸 트랜지스터를 간신히 구했다.
젊은 소원 하나가 분해된 소총 앞에서 손을 멈추며 민준에게 물었다.
“선배님, 이게 정말 발사가 될까요?”
민준은 대답 대신 줄자를 들어 노리쇠 뭉치를 다시 쟀다. 0.01mm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정밀 작업이었다. 잠시 후 그가 낮게 말했다.
“되도록 만들어야 해.”
그뿐이 아니었다. 복사기 한 대 빌릴 수 없는 처지였지만, 매일 밤 100쪽이 넘는 보고서를 작성해 청와대와 국방부에 제출해야 했다. 그 난관을 해결해 준 것은 뜻밖에도 패터슨 미군 대령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이 연구소에 있는 것처럼 서류를 꾸며 복사기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대령님, 이러다 곤란해지시는 거 아닙니까?”
“내가 알아서 할 일이오. 당신들 하는 일이 옳으니 계속 하시오.”
한국 방위산업을 향한 패터슨 대령의 마음은 그 어떤 기술 지원 못지않게 값진 것이었다.
그로부터 40여 일간 7개 품목의 시제품이 완성됐다. 청와대 보고를 마친 후 사흘이 지난 12월 24일, 다락대 사격장에서 운명의 실사격 시험을 실시했다. 흙먼지를 뚫고 울려 퍼진 박격포의 굉음, 소총의 연발 사격 소리가 이어졌다. 시제품들이 하나하나 발사 시험을 통과했다. 시험 발사를 초조하게 지켜보던 소원들의 마음에 희망이 피어올랐다.
‘우리 손으로 무기를 만들 수 있다!’
그 가능성 하나가 홍릉의 불빛을 더욱 환하게 밝혔다.

#4 백곰, 하늘을 향해 날다

번개사업의 성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1974년, 연구소의 한 팀이 A시의 황량한 해안가로 내려갔다.
‘A시 측후소’라는 명목으로 모였으나, 그들의 임무는 사거리 180km의 지대지 미사일을 만드는 것이었다. 기술은 철저히 봉쇄되어 있었다. 미국 방산 기업은 나이키 미사일을 지대지 미사일로 개조해 주는 대가로 무려 2,000만 달러를 요구했다. 연구진은 그 거액의 본계약을 맺는 대신, 일단 180만 달러짜리 예비 설계 계약만 체결하고 미국으로 날아갔다. 소원들은 현지에서 방산 기업 연구원들과 나란히 앉아 설계 자료를 살피면서 보고 배울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머릿속에 담았다. 귀국 후 독자 개발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자 본계약을 조용히 취소했다. 2,000만 달러짜리 기술을 180만 달러로 손에 넣은 셈이었다.
A시의 겨울은 모질었다. 소원들은 폭설 속에서 야외에 나가 미사일 동체를 조립했다.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요?”
누군가의 물음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한 연구원이 눈보라 속에서 고개를 들며 말했다.
“백곰으로 합시다. 이 모진 눈보라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우리 모습 같지 않소?”

#5 담뱃갑 은박지의 기적

1978년 9월 26일, 백곰의 공개 시험 발사일. 시험장에 대통령과 군 수뇌부가 집결했다. 점화 스위치를 누르자 백곰은 거대한 화염을 내뿜으며 하늘을 갈랐다. 백곰이 정확히 목표 지점을 타격하는 순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 지대지 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국가가 되었다. 흥분에 휩싸인 민준은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악수를 나누는 한 소장과 대통령의 모습이 부옇게만 보였다.
민준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발사 하루 전날 밤의 일을 돌이켰다. 발사장의 추적 레이더 전파가 너무 강해 수신 안테나가 먹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대로 행사를 취소할 수는 없습니다!”
한 소장의 고함이 연구실에 울려 퍼졌다. 민준과 소원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해법을 찾았다. 특수 보호재를 구하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전파 차폐가 문제야. 뭔가 감싸야 해, 뭐든.”
“지금 당장 구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민준의 눈에 구석에 놓인 담뱃갑이 들어왔다. 그는 아무 말없이 담뱃갑을 집어 들곤 담뱃갑의 은박지를 뜯어 안테나 노즐 목에 씌웠다. 임시방편이었지만, 그것이 전파 간섭을 막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6 숫자는 영원히 남는다

1979년 10월, 다시 홍릉.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연구소에 찬바람이 불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며 미국의 압박은 날로 거세졌다. 핵무기 개발 계획은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았고, 1981년에서 1982년 사이 유도탄 연구팀 핵심 인력들도 줄줄이 연구소를 떠나야 했다. 민준은 자신의 손으로 작성한 연구 데이터들이 폐기물 트럭에 실려 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우리가 몇 년을 쌓아온 건데···.”
소원의 말에 그는 답하지 못했다. 대신 숫자를 떠올렸다. 사라지는 것은 종이일 뿐, 체계와 기준과 기술은 여전히 두 손에 남았다.

1970년부터 1979년까지 연구소는 1조 8,145억 원이라는 씨앗을 뿌렸다. 이 씨앗에서 자라난 결실은 상상 이상이었다.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절감된 예산은 25조 3341억 원에 달했다. 사업별 성과는 더욱 극적이다. M60 기관총 하나를 만드는 데 들인 비용으로 537배의 효과를 냈고, 155mm 곡사포탄은 239배, 자주곡사포는 236배, 전투용 장갑차 K-200은 101배의 효율을 보였다. 1을 투입해 100, 아니 200을 얻어낸 셈이었다. 성과는 장비의 수명 주기에서 더욱 빛난다. 개량과 효율화를 통해 수년, 수십 년에 걸친 운용 비용까지 절감되었고, 초기 투자 이상의 가치를 꾸준히 창출했다. 수 년 간 반복되는 유지와 교체 과정에서도 절감 효과가 누적되었다. 민준과 ‘홍릉 사람들’이 일군 노력은 숫자 너머 기적을 일으키고 있었다. 민준은 주머니 속 수첩을 꺼냈다.
“380g. 사과형.”
단 5g 오차를 맞추기 위해 무수히 반복한 기록. 그 사소한 집요함이 결국 수십 조 원의 차이를 만들었다. 기록은 체계가 되고, 체계는 나라를 지킨다. 이렇게 다시 하나하나 해 나가면 될 것이었다.

#7 한 고비 너머 또 한 고비

1983년 겨울, 대전. 바깥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갔지만, 연구소는 새로운 과업에 당면해 있었다. 민준은 눈앞에 놓인 도표 하나를 두고 3시간 동안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이 수치는,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아.”
순간, 알 수 없는 불빛이 계측기 사이로 반짝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그들의 발걸음을 기다렸다.
다음 고비는 이미 시작되었다.

<무내미> 196호 5+6월호에서 다음 내용이 이어집니다.



1970년대 국방과학연구소의 경제 효과



당신의 연구 성향 테스트

민준은 연구소 실험실에서 수십 조 원의 절감 효과를 창출한 뒤, 새로운 장비의 수명 주기와 개량안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표 속 수치가 계속 그를 괴롭힙니다. 당신이 주인공 민준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요?

1.

실험을 반복해 기존 데이터를 다시 검증한다.

꼼꼼하고 신중한 당신. 작은 오차라도 놓치지 않고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입니다. 철저한 검증으로 미생물을 연구한 실험가 루이 파스퇴르와 닮았군요.

2.

새로운 설계안을 바로 적용해 실험을 진행한다.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당신. 아이디어를 신속하게 현실화하며 발명과 실험을 통해 혁신을 이끈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과 비슷합니다.

3.

기록과 도표를 잠시 내려놓고, 현장을 직접 점검한다.

직관적이면서도 관찰력이 뛰어난 당신. 실험실과 현장을 넘나들며 연구를 이끈 선구자 마리 퀴리와 매우 유사한 면모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