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를 길어 올리는 땅,
영월 지질 기행
글. 편집실 사진.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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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 강원도 영월이 오랫동안 묻어둔 속 깊은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깊고 어두운 탄전, 깎아지를 듯한 벼랑, 굽이치는 물길을 따라 한 걸음씩 옮겨 봅니다.
고씨동굴
요선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곳에 영월이 있다. 해발고도 1,000m 안팎의 거대한 산이 사방을 두르고, 산과 산 사이마다 맑은 물이 스며 흐르는 고장. 남한강 상류인 동강, 서강, 주천강은 맞닿았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흐르는 물길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독특한 침식·퇴적 지형이 나타나 아득한 시간을 짐작하게 한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힌 나무는 지열과 압력을 견디며 서서히 다른 물질로 변한다. 식물의 조직을 이루던 성분은 서서히 탄화하면서 단단한 검은 광물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석탄이다. 강한 열을 내고 불이 잘 붙는 이 광물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인류 문명을 움직인 핵심 에너지원으로 자리 잡았다. 어둡고 위험한 갱도 속에서 하루를 버텨야 했던 광부들에게 석탄은 생계 수단이자 삶 자체였다.
강원도 영월 일대에는 무연탄 지층이 넓게 분포한다. 1935년 마차지구에 영월광업소가 문을 열면서 정선과 태백, 삼척의 깊은 산골마다 탄광촌이 들어섰고, 1960~1970년대에는 한국 산업화를 떠받치는 에너지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1980년대 이후 환경문제와 에너지 구조의 변화 속에서 석탄 산업은 급격히 쇠퇴했고, 광산의 불빛도 하나둘 꺼져 갔다. 이제 산속에는 한 줄기 길만이 남아 과거를 기억한다. 석탄을 실어 나르던 산길, 운탄고도다. 영월 청령포에서 출발해 정선과 태백을 지나 삼척 소망의 탑까지 이어지는 173.2km의 운탄고도는 조선 왕조의 시린 역사와 광부의 고단한 삶을 아우른다.
고생대 석탄기에 번성한 식물에서 유래한 유기 퇴적물이 오랜 시간 지압과 지열을 받아 분해·변성되어 생긴 퇴적암이다.
탄산칼슘으로 이루어진 퇴적암 일종으로, 탄산염을 형성하는 생물의 유해가 퇴적·고결되어 만들어진다. 주성분은 방해석과 아라고나이트이며, 건축 자재를 비롯해 공예와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쓴다.
뛰어난 내열성을 지닌 광물로, 강도가 높아 고온 환경에서도 형태를 유지한다. 우수한 전기 전도성과 열전도성 덕분에 첨단 산업, 항공우주, 군수 분야에서 널리 활용하고 있다.
운탄고도 1길은 영월 청령포에서 시작해 단종의 역사와 탄광촌의 기억을 동시에 따라 걷는 길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대사에 따르면 청령포는 “삼면이 서강 강물로 둘러싸이고 육육봉 암벽이 가로막아 배를 타지 않으면 세상으로 나갈 수 없는 천연 감옥”이다. 산 속의 섬이라 부를 만큼 척박한 유배지였지만, 가지를 굽힌 ‘엄흥도 소나무’와 하늘을 향해 뻗은 관음송이 임금의 고독을 묵묵히 어루만졌을 것이다.
숲길과 물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고씨굴에 다다른다. 주굴과 지굴의 길이가 약 3,000m에 이르는 석회동굴로, 석회암 층에 발달한 절리에 지하수가 흘러 고드름 모양을 지닌 종유석과 땅에서 솟은 듯한 석순 등 독특한 지형이 생겨났다. 갈로아 곤충을 비롯한 희귀 생물의 서식지로도 생태학적 가치가 높다. 임진왜란 때 고씨 일가가 여기 몸을 숨겼다고 해서 유래한 이름을 되새기다 보면 문득 마음 한편이 아릿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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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탄고도 1130 통합안내센터
석탄을 나르던 높은 길이란 뜻을 지닌 트레킹 코스 운탄고도. 코스 중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정선 만항재의 해발고도 1,330m에서 숫자를 딴 ‘운탄고도 1330 통합안내센터’를 운영한다. 운탄고도 영월 구간은 청령포 통합안내센터에서 출발해 고씨굴까지 이어지는 1길 ‘성찰과 여유, 이해와 치유의 길’, 고씨굴에서 만경대산 해발 700m 구간의 옛 탄광촌 모운동까지 다다르는 2길 ‘김삿갓 느린 걸음 굽이굽이 길’로 이루어진다. 모운동에서 시작하는 3길 ‘광부의 삶을 돌아보며 걷는 길’은 석항역을 지나 정선 구간으로 접어든다. 운탄고도 주변에는 산꼬라데이길, 외씨버선길 등 샛길도 여럿이라, 봄볕을 등짐 삼아 함께 둘러보며 걷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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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문화제
열일곱 나이에 세상을 떠난 왕 단종을 애달파한 유배지의 주민들은 오늘날까지도 그를 추모하며 넋을 기리기 위한 행사를 연다. 1967년 출범한 ‘단종문화제’가 올봄 59회를 맞아 장릉, 동강둔치, 관풍헌 등지에서 성대한 막을 올린다. 조선 시대 국장을 재현하는 행사 단종국장, 강원도 무형유산 단종제향,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퍼레이드로 이루어진 행사는 올해 <왕과 사는 남자> 흥행에 힘입어 더 알찬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영월 특산물과 요리법을 발굴하는 경연대회 ‘단종의 미식제’도 함께 둘러보면 좋다. 올해 주제는 ‘영월의 맛으로 차리는 따뜻한 위로의 한 그릇’. 어수리 나물, 다슬기 등 영월에서 난 식재료 중 한 가지 이상을 주재료로 쓰는 것이 원칙이다.
영월 북서쪽 무릉도원면에 펼쳐진 기암괴석 요선암은 서예로 이름난 문인 양봉래가 평창군수 시절에 명명한 이름이다. 얼마나 아름답기에 무릉도원이며, 신선을 맞는 바위라는 걸까. 눈부신 주천강 물길, 이 물길이 오랜 세월 벼려온 거대한 쉼표 모양 돌개구멍을 맞닥뜨리는 순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요선암을 조망하는 정자 요선정에 오르면 돌에서 걸어 나올 듯한 동세의 신묘한 마애불도 만난다.
서강의 감입곡류하천이 빚어낸 한반도지형은 영월 지질 기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하다. 주변에 석회동굴과 돌리네, 하식애 등 강의 침식과 퇴적이 이룬 독특한 풍경도 이 일대에서 한데 관찰할 수 있다. 한반도지형 너머 거대한 석회암 광산이 드러난다. 수억 년 전 바다의 흔적인 이 석회암은 오늘날 우리 문명을 지탱하는 자원으로 쓰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에 에너지를 길어 올리는 땅, 영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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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지오뮤지엄
강원도 영월, 정선, 태백, 평창 일대는 고생대의 지질과 지형학적 특성이 잘 드러나 ‘강원고생대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해 보존한다. 영월 한반도지형과 요선암 돌개구멍, 청령포, 동강, 고씨굴, 선돌 등이 강원고생대 국가지질공원을 대표하는 지질 명소로 꼽힌다. 2022년에 개관, 지난해 12월 새 둥지를 튼 영월지오뮤지엄은 영월의 지질학적 자원과 광업 역사를 망라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옛 쾌연재도자미술관을 활용한 전시관은 총 다섯 구역으로 이루어진다. 상동광산과 텅스텐 이야기, 석탄과 화력발전 역사, 삼엽충을 비롯한 고생대 화석, 한반도를 이루는 암석과 희귀 광물을 소개하는 전시관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영월이 지닌 고유한 아름다움이 한층 선명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