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읽고 미래를 상상하다
소설가 배명훈
BAE MYUNG HOON
글. 강나은 사진. 박기현
글. 강나은 사진. 박기현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제1차 세계대전 초반에 도입된 슐리펜 계획*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제출한 소설가가 있다. 그는 단편소설 <엘리베이터 기동 연습>에 독일군의 철도 배차 시스템을 동원하고, 장편소설 <은닉>에서 마치 오늘날의 전쟁을 보고 온 듯 초소형 드론이 일상 깊숙이 침투한 모습을 그렸다. 도서관에서 ‘청구 기호 355’로 분류되는 군사 분야 서가를 뒤지던 대학원생 시절의 이야기는 단편소설 <355 서가>에 그대로 남았다. 과거, 현재, 미래의 전쟁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사람. 배명훈 작가에게 전쟁은 작품의 배경이자 소재이며, 주제이자 영감 자체다.
* 슐리펜(Schlieffen) 계획:
1905년 프로이센 육군 참모 총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구성한 독일 제국 전쟁 계획으로,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통과하는 전략이 골자다.
국가 간 협력과 갈등을 연구하는 학문인 국제정치학의 최종 목표는 평화와 안정, 상호 이해다. 배명훈 작가는 외교사를 공부하며 전쟁이란 빈틈을 파고드는 게 즐거웠다. 외교사에서 전쟁은 시작과 결과만 부각될 뿐 과정은 건너뛰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흐름을 살피다 보니 전쟁을 어떻게 치르느냐에 따라 국제 관계 판도가 뒤바뀐다는 점을 깨달았다.
“예컨대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모두 러시아가 이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이 승리했잖아요. 이 사실은 기존의 국제 질서를 완전히 흔들어놓았어요.” 아시아의 작은 나라 일본이 유럽 강국을 격파했다는 사실은 당시 서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한반도 지배권을 강화해 보호국화, 식민지화를 추진했다. “이렇듯 전쟁사를 빈 곳에 넣으면 퍼즐이 맞아떨어지곤 해요.”
그때부터 배명훈 작가는 ‘355 서가’를 뒤지며 퍼즐 찾는 재미에 흠뻑 빠진다. 논문을 마치지 못하고 죽은 대학원생 귀신이 서가를 떠돌며 대출 중인 책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355 서가>는 그 시절을 자조하는 기록이다. 다른 작가들이 잘 읽지 않은 책이 즐비했던 서가는 그의 이야기가 지닌 고유함의 밀도를 높였다. 이때 채워 넣기 시작한 퍼즐은 석사 논문으로도 이어졌다. 주제는 제1차 세계대전 독일군의 전쟁 계획. 당시 최첨단 운송 수단이 철도였기에 전쟁 계획의 상당 부분은 철도 배차에 할애됐다. 어떤 경로로, 얼마나 많은 병력을 이동시키느냐가 관건이었다. 이 내용은 연작소설집 <타워> 속으로 고스란히 들어온다. 674층짜리 초고층 건물이자 도시국가 ‘빈스토크’에서 엘리베이터 배차를 운용하며 병력을 수송하는 이야기를 담은 <엘리베이터 기동 연습>이다.
전쟁은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소비하기에 윤리적 부담이 따르는 소재다. 특유의 폭력성, 정치성 등이 감정적 장벽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쟁이란 화두는 늘 조심스럽지만, 배명훈 작가는 평화를 사랑할수록 전쟁에 대해 말하고 공부해야 한다고 믿는 예술가다.
“불을 끄는 소방관이 불씨를 연구해야 하는 것처럼 평화주의자라면 전쟁에 대해서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평화는 구호만 외친다고 얻어지지 않으니까요.” 세계 곳곳에서 포성이 끊이지 않는 오늘, 전쟁은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배명훈 작가는 드론이 전쟁 양상을 크게 바꿀 것이라고 본다. 드론은 전쟁의 공포를 일상으로 끌어들인다.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폭격기와 달리, 드론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깊숙이 침투해 폭발물을 떨군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전선과 민가가 분리되어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민간 지역에 폭격이 가해졌다. 이제 드론 전쟁의 공포는 좁은 골목까지 스며들 것이다. 소설 <은닉>에도 이러한 우려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곤충 크기의 초소형 드론이 일상의 풍경을 어떻게 바꿔 놓을까.
인공지능은 배명훈 작가가 주목하는 다음 소재다. 그는 1920년 카렐 차페크가 ‘로봇’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희곡 <R.U.R.>에서부터 제기된 윤리적 질문을 상기했다. “인공지능 개발자 사이에서도 로봇의 여러 분야 가운데 돌봄과 의료 부문을 먼저 개발하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났어요. 유엔에서도 ‘킬러 로봇’ 규제 운동이 대규모로 이뤄졌고요. 하지만 인공지능이 고도화되자 이는 곧장 무기로 탈바꿈했죠. 마치 20세기 내내 쌓아 온 암묵적 합의가 없었던 것처럼요.”
인공지능 무기화는 전쟁을 새로운 국면으로 몰고 간다. 전통적 군사 전략의 핵심은 상대의 사기를 꺾는 방법에 있었다. 병력의 10%만 손실해도 전세가 무너지는 일이 흔했으나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이루어진 군대는 두려움도, 피로도 없이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다. 언젠가는 게임 유닛처럼 움직이는 기계가 전장을 채울 것이다. 그런 날이 오면 인간은 최전선에서 기계를 보호하는 정찰병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전쟁은 언제나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왔다. SF라는 장르의 탄생도 바로 이 과학기술에 대한 믿음 덕분이었다. 20세기 초입,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은 과학기술로 세계를 바꾸는 이야기를 신화처럼 담아내며 SF 소설의 시작을 열었다. 어느덧 미국의 기세는 베트남 전쟁과 함께 서서히 꺾였고, SF 소설이 집중하는 주제도 달라졌다. 더 이상 ‘과학기술이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가 아닌, ‘그 세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로 변모한 것이다. 배명훈 작가의 문제의식 또한 여기서 출발한다. “대부분 소설에서 세계는 배경이나 무대 역할에 머무르지만, SF에서는 세계 자체가 움직입니다. 이 세계의 규칙이 인간의 서사와 맞물릴 때, 비로소 SF 장르가 완성되는 거죠.”
배명훈 작가에게 국제정치학은 마치 인공위성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듯한 거시적 관점을 지니게 했다. 한 인물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세계, 그리고 이 세계의 구조와 규칙이 언제나 한몸처럼 연동되는 이유다. 그의 소설에서 엘리베이터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전술을 운용하는 중심축이 되고, 화성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새로운 국제정치 질서가 형성되는 무대로 살아난다.
이제 시야를 미래의 전쟁으로 넓혀 볼 때다. 먼 훗날 전쟁은 지구가 아니라 우주를 배경으로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각국의 우주 정책은 사실상 체면 경쟁에 가까웠다.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이 그랬듯, 오늘날에도 여러 국가는 자국의 과학기술 수준을 과시하기 위해 우주로 나아간다. 경제적 관점을 적용한다면 아직 우주에서 얻을 만한 실질적 이익은 거의 없다. 설사 가치 있는 자원이 발견된다 해도, 이를 지구로 운송하는 비용을 고려하면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
군대는 우주 개척에 확실한 명분을 내세우는 유일무이한 집단이다. 바다에는 제해권이, 하늘에는 제공권이 있듯, 우주에도 ‘제우주권’을 장악하려는 열망이 생겨난다. 다만 이는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우주 조약의 핵심 원칙, 즉 ‘누구나 우주에 접근할 수 있다’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결국 우주 기술과 우주군이 발전할수록 이 충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그의 장편소설 <빙글빙글 우주군>의 서사가 이런 미래를 내다본 결과물이다. “빨라도 50년, 늦으면 100년 후일 수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이 원칙을 깨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겁니다.”
배명훈 작가는 특별한 방식으로 다양한 분야와 교류해 왔다. 외교부와 협업하며 ‘화성에 인류가 정착하면 어떤 국제정치 질서가 형성될까’를 연구했고, 장교를 양성하는 사관학교 강단에 올라 우주 전략 강연을 펼치거나, 미래 전쟁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SF 소설가이니만큼 과학계와의 우정도 두텁다.
그는 설렘을 안고 기꺼이 다른 세상으로 뛰어든다. “연구자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기면 그저 반가울 따름입니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소설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물론 아이디어가 소설이 되기까지는 숙성할 시간이 필요하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10년이 훌쩍 지나서야 소화해 내기도 한다. 머지않아 나올 새 소설은 아이디어 구상에서 집필까지 무려 1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배명훈 작가가 그려 온 미래의 전장은 공상 너머 기술적 가능성을 섬세하게 짚어 낸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이 가능성을 현실로 옮기는 일은 국방과학연구소의 몫일 테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설계하고, 언제나 한 걸음 앞서 구현하는 힘. 그리하여 미래는 상상하는 자, 실현하는 자의 것이다.
Profile.
한국을 대표하는 SF 작가로, 국방 과학기술에 대한 정교한 상상력과 사실감 넘치는 묘사가 빼어나다. 2005년 ‘Smart D’로 과학기술 창작문예 단편 부문에서 수상하며 등단했고, 2010년 <안녕, 인공존재!>로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 <은닉>, <타워>, <신의 궤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