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May + June Vol. 196
PATHFINDER

줄탁동시, 함께 밝혀낸 분자 원종성 선임연구원·김경범 중위

글. 강나은   사진. 박기현   일러스트. 챗GPT

줄탁동시, 함께 밝혀낸 분자 원종성 선임연구원·김경범 중위

수천 도 마찰열에 휩싸인 극초음속 비행체의 표면을 지키는 물질. 바로 벤조옥사진 수지입니다. 선진국에서 독점 중인 전략 소재, 벤조옥사진 수지의 국내 자체 개발 설계에 뛰어든 원종성 선임연구원과 김경범 중위를 <무내미>가 만나러 갑니다. * 줄탁동시(啐啄同時): 알 속 병아리와 알 밖 어미 닭이 부리를 쪼아 알을 깨뜨리려는 행동을 뜻하며, 사제 사이 인연이 무르익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사자성어다.

1 우리 손으로

운명을 바꾼 한 마디

2024년 가을, 김경범 중위는 출장길에 동행한 원종성 선임연구원에게 조심스러운 물음을 건넨다. “우리 손으로 만들면 어떨까요?” 벤조옥사진 수지 독자 개발을 제안한 순간이었다. 기초연구에 머문 한국 연구 실정을 고려할 때 합성·공정·물성 확보 등 모든 단계에서 높은 난도를 요구하는 과업이었다. “도전적인 프로젝트라고 생각했죠. 이미 아이디어 수준을 넘어선 김 중위의 고찰이 인상 깊었습니다. 왜 벤조옥사진이 필요한지, 어떤 방향으로 차별화할지 명확했거든요.” 원종성 선임연구원의 마음에 닿은 것은 ‘왜’라는 후배의 문제의식이었다. 극초음속 비행체와 우주 열방호 분야에 속하는 이 물질은 수출입을 엄격히 제한하는 전략 소재로, 자체 기술 확보가 곧 무기체계의 신뢰성을 의미한다. 해군 출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오래전부터 방산 연구에 관심을 둔 과학기술전문사관인 김 중위에게 벤조옥사진 수지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김 중위와 원 선임연구원, 두 사람의 걸음은 그렇게 한 점에서 만났다. “입사 후 제가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이 궁금한지 박사님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신뢰가 쌓였습니다. 출장길에 받은 자료를 공부하다 ‘국내에서 합성한 사례가 없다’라는 말씀에 그대로 빠져들었죠.”

2 분자의 건축

작지만 빽빽하게, 두 팔로 감싸는 구조

두 사람은 2025년 1월부터 연구에 돌입한다. 응용 연구가 주를 이루는 팀에서 기초합성연구를 구축하기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오래 사용하지 않은 장비를 재정비하고 직접 수리해 가며 공간을 확보해야 했다. 김 중위가 제안한 분자설계의 핵심은 ‘작지만 탄탄하게’다. “무언가를 감싸 안아야 한다면 한 팔보다는 두 팔을 이용해야 더 단단하겠죠. 분자구조에도 양팔의 기능을 적용한 결합 형식으로 가교 밀도와 활성화 에너지를 함께 끌어올렸어요. 동시에 모노머 크기를 최소화해 분자 사이까지 빽빽하게 채워지도록 했죠. 경화 후 매우 밀집한 폴리머 구조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선배는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벤조옥사진은 조건이 조금만 달라도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실패 데이터까지 모두 기록으로 남기도록 했어요. 왜 이 구조를 설계하는지, 어떤 물성을 확보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짚어두는 것이 곧 독자 기술을 확보하는 길이었으니까요.”


벤조옥사진은 조건이
조금만 달라도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실패 데이터까지
모두 기록으로
남기도록 했어요.

3 실패의 항법

좌절을 내비게이션으로 바꾸는 법

실패는 수백 번 거듭됐다. 합성 연구가 처음인 김 중위에게 결과를 얻지 못한 시간은 유독 길고 무거웠다. “종일 기분이 가라앉은 저를 보고, 원 선임연구원님은 좌절이 아닌 극복을 가르쳐 주셨어요. 실패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야말로 더 큰 도약을 위한 내비게이션이며, 성공에 도달하는 최단 거리라는 사실을 배웠죠.” 반년쯤 흐른 어느 날, 분석 결과를 확인하던 김 중위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처음으로 목표 수치를 넘어선 순간이었다.
“온몸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아, 이것이 연구자가 느끼는 도파민이구나!’ 팀장님과 박사님께 자랑하며 아이처럼 복도를 돌아다닌 기억이 납니다.” 한편 원 선임연구원의 반응은 의외로 차분했다. 흥분을 가라앉힌 원 선임연구원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은 “특허부터 준비해라”였다. “야근을 불사하고 주말까지 반납하며 달린 후배에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먼저 꺼내자니 조금 미안했지만, 특허등록을 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요. 우리 기술로 인정받기 위해 그 단계가 절실했습니다.”

4 화염 속 증명

토치 시험이 가려낸 한 줄의 우위

개발된 벤조옥사진 수지의 진가는 토치 환경시험에서 드러났다. 극초음속 비행의 극초고온 조건에서 두 사람이 만든 벤조옥사진 수지 기반 소재는 기존 방산업체의 상용 수지를 넘어선 성능을 보였다. “첫 시험엔 의심했고, 두 번째엔 신기했어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반복 시험을 거치고 나서야 성능의 실체를 받아들였습니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원 선임연구원님도 저도 큰 희열에 젖어 있었죠.” 변성에 활용한 결합 구조는 고온과 화염 안에서 열 발산과 난연 성능을 동시에 드러냈다. 합성 공정은 단가가 낮고, 공정 단일화가 가능하며, 작업장 환경에 유해 물질을 거의 발산하지 않는다는 점도 큰 이익이었다. 물론 재료 선정 당시의 단가 경쟁력까지 염두에 둔 결과였다. 이 성과는 해당 분야 최상위 학술지 에 게재해 학문적 가치까지 인정받았다. 까다로운 리뷰어의 질문은 비방이 아닌 흥미와 인정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소재의 높은 가교도를 이론적 논리로 답하고, 응용성을 보여 줄 추가 분석을 제공하니 학술지 게재 결정이 속전속결로 이루어졌어요. 독자가 흥미를 느끼도록 초록을 풀어 쓰라고 조언해 주신 원 선임연구원님의 가르침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5 줄탁동시

안과 밖이 같은 박자로 부딪칠 때

두 사람을 더욱 단단하게 묶어준 것은 실험실 밖에서 함께한 시간이다. 연구소 풋살팀 ‘FC MinE’의 2024년 우승은 두 사람의 동료애가 빛난 한 장면이다. 매주 화요일 함께 땀을 흘리고, 이따금 다른 경기에서도 만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둘은 경기장에서 다진 신뢰를 연구실로 고스란히 옮겨 왔다. “연구자는 분야가 서로 달라도 하나의 목표를 향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풋살도 마찬가지예요. 서로의 역할을 이해하고 빠르게 소통하며 호흡을 맞추는 과정이 자연스레 연구 협업 문화로 이어졌습니다.” 선배는 후배의 ‘왜’를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후배는 선배의 ‘어떻게’를 끝까지 따라가는 사람이었다. 인생의 멘토이자 연구의 길잡이로서 일과 사적인 고민까지 함께 나누었다는 김 중위는 부리로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끼와 밖에서 알껍데기를 쪼아 깨뜨려주는 어미의 호흡을 닮았다고 회상한다. 한 호흡으로 분자라는 알을 깨낸 이들의 도전에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옛말을 포개본다. 또 다른 알을 깨는 순간까지, 두 사람의 도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특허증과 논문 수상 기록이 두 사람의 빛나는 성취를 증명하고 있다.

원종성
선임연구원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국방 소재는 단기간에 성과가 나오는 분야가 아닙니다. 긴 시간 실패와 검증을 반복하며 기술을 축적해야 하지요. ‘언젠가 반드시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라는 책임감으로 함께 도전해 봅시다.

김경범
중위


전역 이후에도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연구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연구자로서 성장하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다고 느낍니다. 원종성 선임연구원님을 비롯한 훌륭한 구성원과 함께 국가안보를 위해 헌신하는 연구자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