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족 보행 로봇의 세계를 확장하다
황보제민 교수
HWANGBO JEMIN
글. 강나은 사진. 박기현
글. 강나은 사진. 박기현
사족 보행 로봇 ‘라이보’를 개발한 황보제민 교수는 단언합니다. 10년 내에 로봇이 보병을 대체하고, 단 한 명의 인간이 50대의 로봇을 지휘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이 거대한 시나리오는 이제 연구실을 넘어 현실에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육해공군 합동 작전의 핵심 축으로 거듭날 사족 로봇의 진화, 그리고 기술 선도형 기업으로서 내딛는 광폭 행보를 따라가 봅니다.
로봇이 동물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까? 여기 상상을 실현에 옮기려는 공학자가 있다. 발이 푹푹 빠지는 해변에서 최대 초속 3m로 달리는 로봇 ‘라이보’를 공개한 황보제민 교수다.
기구 설계부터 강화학습 제어까지, 전 영역을 자체 개발해 온 그의 연구실은 2024년 마라톤 풀코스 42.195km를 4시간 19분 52초 만에 완주하는 세계 최초의 기록을 세운 ‘라이보2’를 선보였다. 같은 해 그는 KAIST 교원창업기업 ‘라이온로보틱스’를 설립하고, 시리즈A 230억 원 투자 유치까지 이끌었다. 시대의 흐름을 서퍼처럼 유영하는 연구자이자 기업가인 황보제민 교수. 그가 이끄는 사족 로봇의 진화는 지금 어디까지 도달했을까.
RAIBO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수학하던 시절, 황보제민 교수는 여느 학생처럼 진로가 막연했다. 대학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스위스 ETH 취리히에 진학했는데, 석박사과정을 통해 우연히 보행 로봇이라는 분야의 매력을 발견한다. “세상에 이로운 연구가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학업의 결과물이 많은 사람에게 유용하게 쓰인다면 이 과정에 투자한 제 시간도 의미 있겠다고 느꼈죠. 그만큼 성장 가능성이 높고 전망이 밝은 분야니까요.”
박사과정에서 그의 전문 분야는 제어였다. 제어 기술력이 두각을 나타내는 순간은 로봇이 점프하거나 질주하는 등 역동적으로 움직일 때다. 2020년 KAIST에 부임해 ‘라이랩(Rai Lab)’을 꾸리며 내세운 목표인 ‘동물보다 민첩하고 빠르게 이동하는 로봇’은 연구 흐름상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라이랩은 기구 설계와 소프트웨어, 인공지능까지 전 영역을 자체 개발한다. 일부 모듈만 손보는 방식으로 개발한다면 더 효율적이고, 더 빠르게 발전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결코 지름길을 택하지 않았다. “기존에 나와 있는 부품을 조합하다 보면 기술이 쌓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부품을 직접 개발하면서 축적한 기술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부품부터 다른 시스템에 의존하면 결국 한계에 갇힐 테니까요.”
직접 만든다는 원칙은 그가 개발한 시뮬레이션 환경 ‘라이심(Raisim)’과도 맞닿아 있다. 시뮬레이션 안에서 문제없이 작동하던 제어 기능이 실제 로봇에서 잘 적용되지 않아 떨리며 무너지는 현상을 심투리얼(Sim-to-real)이라 한다. 라이온로보틱스에서는 심투리얼의 간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뮬레이션을 정교하게 다듬는 방식을 넘어, 로봇을 설계하는 과정부터 시뮬레이션과 같이 거동하도록 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동력학과 제어 이론, 그리고 이들을 넘어선 복잡한 설계 변수까지 함께 이해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 통합적 접근의 효과는 숫자로도 드러난다. 라이보의 모터 무게는 로봇 전체 무게의 약 30%다. 박사 시절 그가 연구하던 ETH의 로봇에서 모터가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의 5%가 채 되지 않았다. 그사이 이렇게 큰 효율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모터 자체의 효율, 다리와 발의 설계, 모터 제어기, 전체 무게 배분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방정식을 푼 결과였다.
부품 하나부터 손수 만들어야 한다는 황보제민 교수의 원칙은 어떤 면에서 한국 국방기술이 걸어온 길과도 겹쳐 보인다. 우리에게도 일부 핵심 기술을 해외에서 들여올 길이 없지 않았지만, 안주하는 대신 독자 기술 개발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국방력과 K-방산 수출이라는 쾌거에 닿을 수 있었다. 작은 부품이 증명하는 그의 원칙과 성취는 K-방산의 궤적과 닮아 있다. 라이온로보틱스가 그리는 미래에 기대를 거는 이유다.
세계적 로봇 전문 저널 <사이언스 로보틱스(Science Robotics)>에 2023년 게재된 ‘변형 가능한 지형에서의 4족 보행 학습’ 연구에서, 라이보는 발이 완전히 빠지는 해변을 최대 초속 3.03m로 달렸다. 강화학습에 쓸 만큼 빠르면서도 충분히 정확한 모래 시뮬레이터를 만드는 것이 핵심인 실험이었다. “모래라고는 하지만, 사실 무너지는 지형 전반을 일반화한 모델이에요. 매개변수를 바꾸면 잔디처럼 말랑말랑한 땅 위에서도, 아스팔트처럼 단단한 땅 위에서도 달릴 수 있죠.”
지구 표면 대부분이 모래, 흙, 잔디, 진흙처럼 무르고 불안정한 지형이며,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환경도 그렇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시뮬레이터의 의미는 한층 분명해진다.
‘라이보2가 2024년 상주 곶감 마라톤 대회’ 풀코스를 4시간 19분 52초에 완주한 일은 라이보2의 지구력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라이보2가 마라톤에 참가한 결정적 계기는 학생들의 흥미로운 연구 후기였다. “라이보2를 써본 학생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배터리가 좀처럼 닳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산해 보니 이 정도면 마라톤에 도전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지형의 한계를 뛰어넘어 지구력까지 인정받은 라이보는 이미 순찰, 감시, 정찰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단계로 진입했다. 라이온로보틱스는 지난해 방위사업청의 ‘방산혁신기업 100 프로젝트’에 선정되었고, ‘2025 육군 AI·드론봇 챌린지’에서 육군참모총장상(최우수상)을 받았다. 싱가포르 국방과학연구소(DSO)에는 라이보 6대가 공급되어 운용되고 있다. 황보제민 교수는 사족 보행 로봇을 제조하는 기업이 희소한 한국의 환경을 유리하게 여기기보다 오히려 사업 운영과 연구에 책임감을 느낀다.
대한민국 군에서 라이보를 사용할 수 있을까? 아직은 어렵지만, 꾸준한 연구개발이 지속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라이보에 카메라·라이다 같은 감시 장비 같은 기존 무기체계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겁고 두툼한 배낭을 메고 계단을 오른다면 무게중심이 뒤로 쏠려 균형을 잡기 어렵습니다. 라이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에 따라 장착하는 무기나 장비를 최적화한 형태로 설계해야겠죠. 어떤 시나리오에서 어떤 요구 사항을 적용해야 하는지 사용자와 함께 시뮬레이션하고 연구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황보제민 교수는 자신한다. 원격으로,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로봇이 보병의 대부분을 대체하는 데 10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물론 원격조종은 통신 거리 제약 때문에 픽스드 윙 드론이 중계 역할을 하거나, 로봇 위에 자체 드론을 띄우는 방식이 거론된다. 그렇더라도 결국엔 한 사람이 로봇 50대를 동시에 지휘하면서 결정이 필요한 순간에만 알람을 받는 구조로 작전 양상이 변화할 것이다.
이러한 미래 전장 시나리오는 사족 보행 로봇의 발전과 더불어 통신, AI, 위성, 무인기의 진화가 뒷받침되어야 실현 가능하다. 미래 전장에서 사족 보행 로봇은 독립된 장비가 아니라 육해공군 합동작전 안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한 축으로 기능한다. 최첨단 국방기술 시대에는 유기적 작전 수행이 관건이다.
2023년 11월, 황보제민 교수는 라이온로보틱스를 설립했다. 공학자로서 창업자의 길에 발을 디딘 것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로봇을 내 작품처럼 여기면서 온 마음을 다해 만들다 보니 애정이 쌓였습니다. 그러다 더 이상 연구가 아닌 개발이 필요한 시점에 다다랐고, 학교에서 소화하기 어려우니 사업체를 꾸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술 선도형 회사로 우뚝 선 라이온로보틱스는 이제 양산을 앞두고 개발 속도를 높일 계획이다. 지금까지 만든 로봇이 약 20대였다면 올해에는 50대. 내년에는 수백 대, 이후에는 수천 대 이상을 제조하는 회사로 성장하고자 한다.
누군가는 로봇이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하지만, 황보제민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물리적 과업을 로봇에게 맡기고, 인간은 고유한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방과학연구소는 그가 선보인 기술에서 무인체계를 기반한 국가 안보의 미래를 본다. 국방과학연구소가 그와 함께 나아가야 할 길이다.
Profile.
로봇의 한계를 깨고 미래를 설계하는 공학자, KAIST 교수이자 사족 보행 로봇 전문 기업 ‘라이온로보틱스’의 설립자다. 스위스 ETH 취리히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기구 설계부터 강화학습 제어까지 전 과정을 독자 개발하는 기술 자립을 원칙으로 삼는다. 해변 모래사장을 질주하는 ‘라이보’와 세계 최초로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라이보2’를 선보이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현재 대규모 투자 유치를 바탕으로 로봇 대량 양산 체제를 구축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