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숨은 이야기 애국과 혁신의 이순신
글. 편집실 사진. 한상무 작가
글. 편집실 사진. 한상무 작가
올해로 탄신 480주년을 맞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일인 4월 28일은 매년 돌아오지만 언제나 감회가 새롭다. 전란의 시대에서 소리 없는 기술 과학 전쟁으로 발전한 오늘날이기에 더욱 그렇다.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소장은 이순신 장군의 도전 정신과 전략적 결단이 국방과학연구소의 첨단 기술과 융합되어 오늘날 우리 모두가 계승해야 할 뜨거운 의지와 지혜로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남긴 말은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 영웅 이순신 장군에 대한 국민적인 애정은 뜨겁지만, 사극과 영화, 소설에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왜곡이 많다. ‘적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로 알려진 유훈은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 1598년 11월 19일 동틀 무렵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그가 남긴 말은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였다. 평생에 걸쳐 이순신 장군을 연구해온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제장명 소장은 ‘여전히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부하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가 유훈의 참된 의미라고 설명했다.
“치열한 전투 상황에서는 군인의 사기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해전 중 거북선의 머리가 적선에 부딪치는 장면도 고증과 어긋난다. 거북선의 주요 전력은 함포에 있었으며 충파(배를 빠르게 몰아 적군의 배와 충돌하는 기술)는 적합한 전략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군과 전력 차도 컸던 상황이고(일본군 2천여 척, 조선군은 180척 등) 조선과 일본군 선체의 견고성 차이도 크지 않아 충파로는 전력상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이렇듯 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지만 오해도 많이 받아온 이순신 장군은 서울 중구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32세 때 무과에 급제해 관직을 시작했고, 임진왜란 당시 전남 해남 진도, 경남 통영, 남해, 거제 등에서 왜군을 몰아냈다. 그의 인생은 도무지 녹록지 않았다. 7년 전쟁의 영웅이었지만 환대는커녕 오히려 모함을 받았고 백의종군, 압송 옥살이 등 수난을 겪었다. 개인사도 고달팠다. 백의종군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모친이 세상을 떴고, 같은 해(1597년)에 갓 스물이 된 막내아들이 일본군의 칼에 맞아 사망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불행이 계속되면 세상을 원망하거나 도피했을 터다. 그러나 그는 어떤 고난 앞에서도 좌절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왜군을 몰아내고 백성과 부하들을 돌보는 데 집중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제장명 소장은 그의 강인한 정신력과 한결같은 태도의 원천은 애국심에 있다고 설명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순신 장군은 원래 홍문관 대제학, 병조참의를 역임한 명문가 출신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유학을 익혔고, 공도(公道)와 위민(爲民) 등을 근간으로 한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했죠.”
문과에서 무과로 전향한 직접적인 계기는 결혼이었다. 그의 장인어른 방진(方震)은 22살 이순신의 무관으로서의 재능을 알아보고 무과로 방향을 바꿀 것을 제안하고 지원했다. 이순신은 이후 10년간의 수련을 거쳐 32세에 무과에 합격하게 된다. 유학뿐 아니라 병법까지 섭렵한, 요즘으로 치면 하이브리드·통섭형 인재였던 셈이다. 어릴 때부터 유학을 공부하며 갈고닦은 성실하고 곧은 심성을 바탕으로 손자병법, 오자병법, 오위진법 등의 병법서를 공부하던 이순신 장군은 죽음에 초연한 특유의 ‘사생관’에 이르렀다.
“이순신 장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다(사생유명 死生有命)’라고 자주 말할 정도였죠. 애국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신의 안위를 버린다는 생각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애국심만으로는 승리를 이끌어 내기 어렵다. 그를 명장으로 만든 또 다른 축은 혁신적 마음가짐이었다. 당시 조선 수군은 군사적·경제적·정치적으로 쇠약했다. 연산군 이후 4대 사화를 겪으며 조선은 국방에 소홀했다. 무기는 미비했고 병역 기피가 성행했으며 근무 기강도 해이했다. 반면 일본은 조선과 정반대로 막강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내란 형태이긴 했지만, 열도 전역에서 크고 작은 격전을 거듭하는 전국시대를 통해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일궈낼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 장군의 과학적 기술 혁신 때문이었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수군을 대대적으로 개혁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거북선이죠.”
거북선의 원형은 고려 시대 말부터 조선시대 초기에 건조돼 사용했던 군함 과선과 검선이다. 다만 당시에는 화약이 발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포격해도 적선에 맞지 않을 정도로 화력이 안정적이지 않았고, 선체의 크기와 구조도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의 크기를 키웠고 14문의 포문을 설치하고 용머리에도 화포를 달아 전투력을 크게 개선했다. 이는 조선과 일본의 전략 차이를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과 일본군의 전략은 정반대였습니다. 조선은 멀리서 요격을 하는 포격 위주의 전술을 썼고, 일본은 백병전이 주를 이뤘죠. 그들은 칼을 잘 쓰니까요.”
당시 해전은 함대 포격전이 아니라 상대 배에 빠르게 올라타 우위를 점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멀리서 포를 쏴서 적을 무력화시키는, 기존과 다른 전략을 썼다. 사무라이의 나라로 백병전이 유리한 일본군 입장에서는 적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면 장점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또한 설령 백병전 상황이 돼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선체 윗부분은 장갑으로 덮었다.
“거북선은 현재로 치면 해군의 이지스함과 비슷한 위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장거리 미사일을 이용해 적을 요격하는 이지스함은, 수많은 포를 달아 적군이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던 거북선과 닮았죠.”
이순신 장군의 애국심과 과학적이고 혁신적 사고는 단지 한 시대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의 유산은 조선 시대를 넘어, 국방과학의 발전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연구자들에게로 이어졌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방과학연구소는 첨단 국방과학기술 연구를 지속하며 이순신 장군의 고귀한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제장명 소장은 1983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2014년 부산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한국사를 전공해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18년부터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다. 그의 관심이 처음부터 이순신 장군을 향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젊은 시절 그의 시선은 지금과 정확히 반대 지점에 있었다.
“원래는 이순신 장군보다는 그의 부하들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관심이 더 컸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모든 걸 다 한 게 아닐 텐데 왜 이순신 장군만 연구하지?’라는 의문을 품었죠. 그래서 부하들을 연구했는데, 제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조사하면 할수록 부하들보다 이순신 장군이 훨씬 훌륭하다는 걸 알게 됐죠.”
그의 연구는 ‘이순신 장군만을 너무 영웅시 하는 것 아닌가?’하는 비판적인 시각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연구를 지속할수록 이를 반박하는 증거들이 계속됐다. 부하들에 관한 사료에 돋보기를 들이댈수록, 거기에 반영돼 있는 이순신 장군의 뜨거운 애국심과 백성들만 생각하는 일편단심이 부각됐다. 회의와 의문에서 시작한 연구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감탄으로 바뀌었고, 그렇게 빠져들어 오늘에 이른다. 좋아하면 닮는다 했던가. ‘알면 알수록 더 대단한’ 이순신을 연구하는 그의 눈은 이제, 한산도 달 밝은 밤에 큰 칼을 옆에 차고 바다를 바라보던 장수의 눈빛을 닮았다.
Profile.
제장명 소장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소장, 20년간 해군 <충무공리더십센터>와 해군사관학교에서 이순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 종사해왔다. 부산대학교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해 <정유재란 시기 해전과 조선 수군 운용>을 주제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경상남도 <이순신 프로 젝트> 역사고증자문위원과 <난중일기 세계기록 유산> 등재 시 집필위원을 맡는 등 이순신 선양과 세계화 사업에서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제장명 이순신연구소 소장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과 해전 전략 연구·교육을 통해 조선 해군 유산을 현대에 재조명하며 국내외 학술 발전과 문화 보존에 기여한 학자다.
이순신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
임진왜란 중 혁신적인 거북선 도입과 명량 해전 등을 통해 23전 23승의 전적을 기록하며 국민 통합과 국방 강화를 이끈 위대한 조선의 해군 지휘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