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일간의 이탈리아어 정복기 홍성민 소원
글. 이현수 작가 사진. 한상무 작가
글. 이현수 작가 사진. 한상무 작가
1,000일 야화의 매력은 흥미로운 서사뿐만 아니라 지속성에 있다. 셰에라자드는 천일 동안 이야기를 이어가 왕의 분노를 잠재웠고, 홍성민 소원은 1,000일간 이탈리아어를 공부해 중학교 시절의 꿈을 이루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1,500일을 목표로 학습을 계속하고 있다.
“하루만 쉴까 싶은 때도 있었죠. 그런데 밤 10시 반쯤 알림이 와요. ‘너 연속 기록 끊기는데 괜찮아?’ 그럼 그때 ‘아, 맞다!’ 하고 다시 들어가서 또 공부하게 되더군요.”
시작은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이었다. 우연히 집어 든 책 <라틴어 수업>의 첫 장. Magna puerilitas quae est in me(마그나 푸에릴리타스 쿠에 에스트 인 메, 내 안의 위대한 유치함)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를 배우기 시작하는 데는 그리 거창한 이유가 필요 없다”라는 문장에, 홍성민 소원은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작은 소망을 떠올렸다. 그는 약 20년 전인 중학교 시절부터 이탈리아의 축구팀 AC밀란의 팬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중원의 사령관’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지네딘 지단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는 안드레아 피를로가 마음에 들었다. 화려한 발기술이나 박력 있는 드리블 같은 매력은 없었지만, 넓은 시야로 상황을 파악하고 필요한 장소와 시점에 반드시 나타나는 조용한 영웅이라는 점이 끌렸다. 중요한 순간에 정확한 프리 킥을 골대에 꽂아 팀을 승리로 이끄는 점 역시 인상적이었다. 팬심은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어에 대한 관심으로 향했다. 중계 경기에서 한두 마디쯤은 알아듣고 싶다, 언젠가는 ‘최애’가 태어난 이탈리아로 날아가 현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 홍성민 소원은 희미하게 피어났어도 똑똑히 빛나는 작은 불씨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공부 방식은 게임 형태의 학습 앱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짧고 간단한 퀴즈로 구성된 학습 방식, 모바일 앱이라 언제 어디서든 사용 가능한 접근 편리성이 선택 이유였다.
“수업 하나를 완료하는데 길어봤자 5분 정도밖에 안 걸려요. 짧은 퀴즈 형식이라 부담도 없고요. 처음에는 재미 삼아, 게임하듯 가볍게 시작했죠.”
시작은 단순했다. 외국어 학습 앱을 하루에 한 번 켜고, 5분 안팎의 수업을 듣고, 축하 팡파르와 함께 XP(게임 내 경험치)를 받는다. 수업은 기본적으로 퀴즈 게임 형태였다. 수업이 진행되거나 문제를 맞힐 때마다 초록색 진행바가 늘어나며, 문제를 틀리면 빨간 하트(일명 ‘목숨’)가 줄어들었다. 수업은 듣기, 따라 말하기, 적절한 단어 선택하기, 문장 재구성하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게임하는 느낌으로 가볍게 시작했지만, 점점 공부하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해당 앱에는 매주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부추겨서 학습을 독려하는 시스템이 있어요. 공부 초반부에 1년 이상 학습자, 3년 이상 학습자라는 배지를 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대단하다, 나도 저렇게 되어야겠다’라고 다짐했던 게 기억나네요.”
핸드폰 학습 앱으로 공부를 1000일 달성한 홍성민 소원과 태어난 지 1,000일이 된 딸 ‘시윤이’
물론 장애물이 많았다. 업무가 쏟아지는 날도 있었고, 출장으로 육체적으로 피로한 날도 있었다. 올해 4살 된 딸아이의 아빠라 집으로 돌아가면 육아를 해야 하니 늘 시간이 부족했다. 5분에서 30분씩 끈질기게 공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장 큰 위기는 미국 출장이었다. 비행기 타기 전에 앱으로 이탈리아어를 학습해야지 계획해뒀었지만, 그만 깜빡 잊어버린 것. 애틀랜타 공항에 도착하니 계획한 시간보다 이미 10시간 넘게 지나 있었다. 환승까지는 2~3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혹시 몰라 미리 eSIM까지 개통해갔건만, 작동하지 않는 게 아닌가.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한데, 홍성민 소원은 굴하지 않고 와이파이가 잡히는 곳은 없는지 공항 곳곳을 찾아다녔다. 인터넷 접속이 되어야 수업을 받을 수 있으니 마음이 급했다. 마침내 학습 앱에 접속해 수업을 완료해낸 기쁨이란. 해외 출장을 왔으니 느긋하게 하루쯤 공부를 쉴까 하는 생각은 이상하게도 들지 않았다.
또 하나 어려웠던 점은 이탈리아어의 낯선 언어 체계였다. “이탈리아어는 라틴어에 뿌리를 둔 다른 유럽 언어들처럼 명사, 형용사, 관사가 남성격, 여성격으로 구분됩니다. 예를 들어 소녀는 ‘la ragazza’, 소년은 ‘il ragazzo’, 딸은 ‘la figlia’, 아들은 ‘il figlio’라는 식이죠. 처음엔 그게 너무 낯설고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도저히 시간이 안 나는 날에는 ‘얼음 보호막’의 도움을 얻었다. “열심히 수업을 들어서 포인트를 모으면, 그걸로 ‘얼음 보호막’이라는, 공부를 하루 쉬어도 연속 기록이 깨지지 않는 아이템을 살 수 있어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몇몇 날에는 얼음 보호막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것에 의지했다고 자책하지 않고 다음 날 용기를 내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회복 탄력성’이라고 칭했다. 다른 학습자들도 하루 이틀 수업을 못해 연속 기록이 깨졌다고 해서 공부 자체를 포기하지 말고, 다시 기력을 회복해 도전할 것을 조언했다. “기록이 깨지면 어때요. 다음날 다시 하면 되죠. 10번 중에 한 번 깨지면 10%겠지만, 1000번 중에 10번 깨지면 1%잖아요.”
하루하루 완료한 날짜가 쌓여갈수록 뿌듯함이 더 커졌다. ‘오늘도 성공했다’는 앱의 메시지도 든든한 지원군이었지만, 한발 한발 목표에 가까워지는 과정이 은근히 설레었다. 그렇게 100일을 넘기고, 1년을 채우고, 2년이 되고, 마침내 1,000일간 이탈리아 학습을 멈추지 않았다는 기록을 세웠다. 현재 그는 공부 앱 내의 2024년 기준 상위 2퍼센트의 ‘네임드’다. 그가 사용하는 공부 앱이 매일 4,000만 명이 사용하고, 누적 가입자 5억 명인 세계 최대의 외국어 학습 앱인 만큼 이 수치는 의미가 깊다. 현재 앱 내에서 그의 별명은 ‘이탈리아어 왕’.
“지금은 쌓은 실력의 ‘유지 보수’ 단계예요. 새로운 정규 수업은 다 들어서, 매일 6개씩 실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업을 듣고 있어요. 이제는 이탈리아어를 잊지 않기 위해 하고 있는 셈이죠.”
특별한 학습 비법은 없었다. ‘매일 꾸준히’라는 언어 공부의 기본 중의 기본을 끈질기게 소화한 것이 비법이라면 비법일까. 교과서만 봤다는 수능 1등 같은 답변이긴 하지만, 누구나 알고는 있어도 따라 하기는 어려운 것이기에 지금의 결과에 수긍이 간다. 하루하루 쉬지 않고 달린 결과, 그는 중학교 시절의 소박한 목표를 현실로 만들었다. 이제는 이탈리아 축구 경기를 볼 때 해설에서 sinistra(왼쪽으로), destra(오른쪽으로) 등 익숙한 단어들이 들려 경기 관람이 더 즐거워졌다. 이탈리아 여행 회화도 자신 있게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값진 건 ‘습관을 만드는 힘’을 배운 것이다.
“하루에 단 몇 분이더라도 꾸준히 반복하면, 그게 언젠가 큰 흐름이 된다는 걸 알게 됐죠. 이 깨달음이 외국어에 그치지 않고 업무, 건강, 인간관계 등 삶의 모든 영역으로 번져나가더군요.” 그는 100일 동안 연속 학습에 성공했을 때 가장 성취감이 컸다고 전했다. 정작 500일, 600일이 넘어가고 2년이 넘으면서, 이탈리아어 공부는 성취감보다는 생활의 일부이자 삶이 됐다. “이젠 오히려 공부를 안 하면 허전합니다. 생각하기도 전에 학습 앱을 켜죠. 김연아 선수처럼요. 몸을 풀고 있는 그에게 ‘무슨 생각 하세요?’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라고 했던 것처럼요.”
게임 형태의 학습 앱과 2020년부터 사용해온 다이어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