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September+October Vol.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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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저를 읽으며
삶의 방향을 찾다
임승현 소원

글. 이현수 작가   사진. 박기현 작가

명저를 읽으며
삶의 방향을 찾다
임승현 소원

26권. 한 사람이 올해 상반기에 ‘완독’한 책의 목록이다. 관심이 생겨 꺼내들기만 했거나 발췌해 읽거나 뒤적거린 책은 포함하지 않았다. 일과시간에 논문을 읽는 치열한 연구원 생활 속에서도 이와 같은 독서량을 기록한 임승현 현역 연구원을 만나 그에게 독서란 무엇인지 물었다.

독서는 나를 찾는 여행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룰루 밀러)>. 이 책은 자연계에 인간의 질서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오만하고 위험한지 보여주는 책이에요. 평소에 접하지 못했던 주제라 흥미로웠습니다.”
다음은 한 사람이 2025년 상반기에 읽은 책의 목록이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채식주의자, 모순,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암흑의 핵심, 싯다르타, 농담, 비행공포, 윤리학 원리, 시지프 신화, 반항하는 인간, 선악의 저편, 피로사회, 침묵의 세계, 라캉·바디오·들뢰즈의 세계관, 공정하다는 착각, 왜 도덕인가, 새뮤얼슨 vs 프리드먼, 어떤 양형 이유,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세습 자본주의 시대, 보통 일베들의 시대, 21세기 자본,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지식인의 표상.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한참이 걸리는 이 목록에는 한 권을 읽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누군가에게는 권당 한 달이 필요할 수도 있는 깊이 있는 책들이 포함돼 있다. 이 책들을 완독한 사람은 현역 과학기술전문사관 연구원인 임승현 소원. 과학기술전문사관은 뛰어난 과학기술 인재가 군 복무 기간 동안 주요 과학기술 분야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제도로 이스라엘의 탈피오트 제도를 벤치마킹해 국방부와 미래부가 지난 2014년부터 시행 중이다. 하루 종일 논문을 읽으며 분투한 뒤 퇴근한 뒤 또다시 활자를 지친 머리에 집어넣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주에 한 권. 상반기 26권이라는 분량도 놀랍지만 포함된 책들의 무게감을 생각하면 ‘도대체 언제 읽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이유는 그동안 길러온 독서력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임승현 연구원은 독서가 삶의 일부가 된 건 대학 2학년 때부터라고 설명했다.
“어릴 때도 책을 좋아했지만 본격적으로 읽은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어요. 전 일반고 출신으로 고등학교 때 항상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았어요. 그런데 카이스트에 진학하고 나니 주변에 영재가 너무 많은 거예요. 여기 왔더니 제가 평균도 안 된다는 점, 그리고 성적을 중시하는 풍토를 겪으며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어요. 그래서 답을 찾기 위해 손에 든 것이 책, 그중에서도 인문학이었죠.”
특출난 인재들을 만나며 열등감과 불안감이 자극되는 상황, 더불어 약육강식이 당연하다는 풍토에 반감을 느꼈던 그는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에게 답을 보여준 것은 체코 출신 작가들이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보후밀 흐라발)>에는 기계화로 밀려난 인간이 폐지를 작업하면서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정치가 격변하는 와중에 무력한 지식인의 모습에 대한 은유죠. 이외에도 체코 작가들 작품들은 ‘개인은 무력하고 설령 어떤 사상을 가져와도 변하는 세계를 따라잡을 수 없다’라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어요. 저는 이 점이 와닿기도 했지만 또한 부정하고 싶어지더군요. 저는 이들과는 반대로 한 인간의 이념과 선택이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억압된 인간의 자유, 불안정한 정치체계, 지식인의 무력감. 이는 어떤 삶이 후회 없을까를 고민하게 하는 매개체였다. 묵직한 질문들을 받아들고 나는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게 되는 점이 이들 작품의 힘이라고 그는 전했다. 같은 의미에서 실존주의와 카뮈 철학에 대해서도 고민을 이어갔다.
“(목록 중) 가장 오래 읽은 책은 알베르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입니다. 분량도 방대하고 실존주의와 카뮈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한 책이에요. 왜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면 안 되는지에 대한 윤리적 질문이 담겨있습니다.”
탐독은 과학자로서의 진정성에 대한 고민으로도 이어졌다. 과학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는 데 막대한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인문학적 성찰과 인류애적 가치를 바탕으로 과학이라는 ‘도구’를 올바른 방식으로 다뤄야 한다고 그는 소견을 밝혔다.

독서의 기술 : 다르게, 가볍게, 자유롭게

그가 독서를 통해 ‘어디에’에 도달했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달했을까? 임승현 연구원은 퇴근 후와 자기 전을 주로 활용해 책을 읽었다고 전했다.
“저는 의도적으로 독서 시간을 확보해요. 퇴근 후와 자기 전 시간을 활용하죠. 특히,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쇼츠 플랫폼을 자주 시청하다 보면 수면시간이 늦어지고 정신적으로 지치죠. 그 대신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잠이 드는 편입니다.”
책의 내용이 길어질 때는 집중이 안 되기도 한다. 일과 시간의 업무에 지쳐 글을 읽을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마음에 담아뒀던 구절을 필사한다. 친구들이 선물해 준 차를 타서 마시며 명저나 고전소설에서 마음에 담아뒀던 구절을 만년필에 담아 한 문장씩 적어 나간다. 필사는 정성스레 하는 반면 본품인 책은 곱게 모시지 않고 활용성에 중점을 둔다.
“저는 중고서적을 자주 사는 편이고 책도 좀 ‘함부로’ 다룹니다. 책이란 건 매개체, 망가진다고 해도 새 책으로 하나 더 사면 되잖아요. (물이 튀거나 습기로 책이 상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거품 목욕을 하면서 읽기도 하고 책의 일부를 과감히 찢어내서 읽기도 합니다. 버리기도 하고요. 에리카 종의 ‘비행공포’같은 경우엔 마음에 드는 페이지만 남기고 나머지는 뜯어내서 버렸어요.”
책을 통해 감정과 장면을 오래도록 기억한다면 이 또한 충분히 깊은 독서라고 생각하기에 책을 온전히 보존하는 데 집착하지 않는다. 찢어낸 책은 본인이 읽기도 하고 ‘그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 혹은 ‘어울린다’는 취지에서 친구나 지인들에게 건네기도 한다. 받은 사람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고요한 선물은 우정을 더 돈독하게 만들어줬다.
이외에도 독립서점 방문이나 독서모임 참여를 통해 독서의 지평을 넓히고 있는 그가 초보 독서가들에게 추천하는 독서 방식은 두 가지. 하나는 병렬 독서다. 한 권을 끝내고 다음 권으로 넘어가는 직렬이 아닌 관심이 가는 책을 여럿 두고 함께 읽는 방식이다. 다만 그는 5권 이상이 되면 책의 내용이 섞일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전했다. 또 하나는 완독 강박을 버리는 것. 그는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예로 들었다.
“독서라는 건 애매한 영역이죠. 특정한 책을 모두 읽었을 때 독자가 떠올리는 심상은 각자 달라요. 각자의 배경지식과 독해력도 다르기 때문이에요.”
임승현 연구원은 ‘어떤 텍스트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환상’에 대해 짚었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은 체코의 정치 상황에 대한 책으로 읽힐 수 있지만 동시에 연애소설로도 소비될 수 있다. 둘 다 잘못된 것이 아니다. 발췌나 오독도 독자의 권리이며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생각 역시 불필요하다고 전했다.
“저는 완독 강박을 버리면서 독서에 대한 부담을 크게 덜었고 읽는 책의 양도 크게 늘었어요. 독서란 스펙트럼이고 특정한 책과 상호작용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삶이라는 긴 연구과정에서 나를 돌아볼 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재설정하게 해 주는 훌륭한 매개체인 독서. 오늘도 소내 도서관으로 향하는 임승현 연구원이 어떤 책을 새롭게 고를지 궁금해진다.


저는 완독 강박을 버리면서
독서에 대한 부담을 크게 덜었고,
읽는 책의 양도 크게 늘었어요.
독서란 스펙트럼이고 특정한
책과 상호작용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임승현 연구원의 독서 기술:
명저와 고전 속의 마음에 남은 구절이나 잘 외워지지 않는 문장을
만년필로 한 줄씩 옮겨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