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November+December Vol. 193
일상 속 국방과학

치열한 전쟁터에서 풍요로운 식탁으로
전투식량 기술

글. 편집실   사진. shutterstock
출처. 국방일보, 헤럴드경제, 한국경제, 동아일보, 신동아, 지티티코리아 네이버 지식백과

치열한 전쟁터에서 풍요로운 식탁으로
전투식량 기술

전투식량은 말 그대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서 군인들이 먹는 음식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인은 전투식량을 먹을 일이 거의 없고, 자연스럽게 전투식량 제조에 필요한 기술도 먼 나라 이야기로 느낄 수 있는데요. 알고 보면 전투식량 제조 기술은 우리네 주방과 식탁 어느 곳에서나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숫가루에 담긴 신라 군대의 지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죠? 아무리 수려한 금강산을 눈앞에 뒀더라도, 온전히 구경하려면 먼저 배를 채워야 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황폐한 전쟁터에서 거친 전투에 나서야 하는 군인이라면 먹는 일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합니다. 잘 먹어야 싸울 힘과 의지가 샘솟는 법이죠. 그러다 보니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런 말도 생겼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장수는 용서할 수 있어도, 보급에 실패한 장수는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이 부족할 수밖에 없고 온갖 변수가 발생하는 전장에서 군인들에게 제때 먹을거리를 전달하는 건 그 자체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전장 인근에서 식량을 구하거나, 휴대하기 쉽고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챙겨 다녔는데요. 이 중 전투식량은 후자에 속합니다.
식품 보존 기술이 마땅치 않았던 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제대로 된 전투식량을 갖고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전쟁터 주변의 먹거리로 보급을 이어 나가자니 수급의 불확실성과 한계가 컸는데요. 이 점을 해결할 방법을 고심하던 삼국시대의 신라는 북어와 각종 잡곡을 가루 형태로 만든 뒤 간을 해서 그때그때 물에 타 먹었다고 합니다.
현재에도 많은 사람이 식사 대용으로 애용하는 미숫가루의 원조가 바로 이 잡곡 가루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무려 1,5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전투식량 제조 기술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놀랍지 않나요?

근대 전투식량의 산물인 건빵과 통조림

특유의 고소한 맛과 높은 열량, 가벼운 무게와 긴 유통기한 덕분에 등산을 즐기는 분들의 비상식량으로 자리 잡은 건빵도 사실은 간식이 아니라 전투식량의 일종입니다. 곱게 빻은 곡물을 뭉쳐서 구운 뒤 바싹 말린 건빵은 수분 함유량이 매우 낮아서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랜 기간 배를 타야 하는 선원과 해군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육군과 공군에서도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건빵은 명실상부 전투식량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다양한 음식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어 널리 활용되는 통조림도 전투식량 제조 기술입니다. 19세기 초 프랑스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 긴 정복 전쟁을 벌일 당시, 프랑스의 최고 통치자였던 나폴레옹은 효율적인 보급을 위해 식품을 장기간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을 공모했습니다. 그 결과 니콜라 아페르라는 사람이 유리병에 조리한 음식을 담고 살균·밀폐해 비교적 오랜 기간 음식을 보관하는 병조림을 발명했는데요, 이를 본 영국은 한발 더 나아가 보관 기간이 더 길고 파손 위험도 훨씬 낮은 통조림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통을 안전한 소재로 바꾸고 뚜껑을 쉽게 열 수 있는 기술을 더하는 등 여러모로 기술 개선이 이뤄졌지만, 여느 가정의 부엌에 최소 한두 개쯤 비치돼 있을 정도로 현대에도 널리 활용되는 통조림이 1800년대 전투식량 제조 기술에서 기원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없습니다.

전장에서 탄생해 일상으로 스며든 전투식량 기술들: 미숫가루부터 레토르트파우치까지

우리의 식생활을 편리하고 풍성하게

다양한 음식을 장기간 보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좋은 기술이었지만, 통조림에도 약점은 있었습니다. 바로 부피와 무게였는데요, 효율적인 전투를 위해 조금이라도 짐을 줄여야 했던 군인에게 통조림은 가지고 다니기에 상당히 번거롭고 부담스러운 보급품이었습니다.
군인들의 이러한 불만을 받아들인 미군은 1960년대 들어 통조림을 대체할 수 있는 휴대성 좋은 전투식량 개발에 나섰는데요. 가벼우면서도 적당한 강성을 갖춘 플라스틱이 새로운 포장재로 주목받았습니다. 하지만 일반 플라스틱은 열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보존 기간을 늘리기 위해서는 식품이 담긴 용기를 110~120℃에서 4분 이상 살균해야 했는데, 플라스틱은 이 과정을 견딜 수 없었던 건데요, 긴 연구 끝에 미군은 플라스틱 합성수지 필름, 알루미늄 등의 소재를 여러 층으로 접착한 뒤 주머니 모양으로 만든 레토르트파우치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1980년대 후반부터 우리 군인의 입맛을 반영한 레토르트파우치형 전투식량을 개발했습니다. 고추장볶음·통조림·건빵 등 한국식 반찬을 자체적 개발해 보급했으며, 1990년대에 한국형 전투식량 수요가 커지자 국방과학연구소 주도로 현재의 전투용 I형이 완성되었습니다.
해당 기술을 민간에 이전하고 현재는 전투식량 개발을 직접 진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레토르트파우치는 오늘날 전투식량을 넘어 일반인의 먹거리를 담는 포장재로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유통기한이 긴 데다가 구매한 파우치를 그대로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빼면 곧바로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간편함 덕분인데요, 몇 분만 데우면 조리가 끝나는 카레 제품이 대표적인 레토르트파우치 식품입니다.
1996년 강릉 대간첩 작전 이후, 우리 군은 물과 불 없이도 먹을 수 있도록 발열 팩이 포함된 ‘즉각 취식형 전투식량’을 개발함으로써 군인들의 사기와 전투력을 높이는 데 일조했습니다. 이 기술을 활용해 어디서나 음식을 간편하게 데울 수 있는 야외용 발열 팩 조리 기구가 시중에 출시되기도 했는데요, 이 외에도 커피믹스의 핵심 재료인 인스턴트커피, 긴장감과 목마름을 완화하고 공복감을 줄이는 데 도움을 주는 껌 등 다양한 전투식량 기술이 전장 밖 평온한 일상에서 널리 쓰이고 있답니다.


전투식량 기술은 군대를 넘어 일상으로 확장돼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고 새로운 식문화를 열어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전투 식량 I형(레토르트형)
국방과학연구소는 1980년대 후반 군인의 입맛을 반영한 파우치형 전투식량을 개발했으며, 1990년대 수요 증가에 따라 현재의 전투용 I형을 완성했다.
Ⓒ 위키백과

Ⓒ (주)참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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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환경에서도 든든히,
전장을 지탱하는 즉석요리 레토르트파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