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터널 선샤인>으로
풀어본 국방의 기록
한명원 실장
글. 무내미 편집실 사진. 박기현 작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무내미 편집실 사진. 박기현 작가
출처. 네이버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기억이 사라지면 관계와 의미도 함께 잊힌다고 말하듯, 기록은 존재를 붙잡아 두는 힘이다.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그 일을 30여 년간 묵묵히 수행해 온 사람이 기술정보실 한명원 실장이다. 그에게 기록은 연구 시간을 잊히지 않게 하고, 미래 세대가 다시 펼쳐볼 근거가 된다.
이 력
·1993 국방과학연구소 입소
·2006 기술 정보 웹진 <ATiZINE 클릭!> 발행
·2009~2017 종합시험본부 근무
·2021~현재 ADD 기술정보실 실장
“I don’t know! I don’t know! I’m lost! I’m scared! I feel like I’m disappearing! My skin’s coming off! (···) Nothing makes any sense to me!(잘 모르겠는데 너무 무섭고 불안해. 마치 내가 지금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피부가 벗겨지고 있어! (···) 아무것도 이해가 안 돼!)”
미셸 공드리 감독의 2004년 작품으로 짐 캐리, 케이트 윈즐릿, 일라이저 우드, 마크 러팔로 등이 출연한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의 중요성에 대한 영화다. 주인공 조엘은 헤어진 연인 클레멘타인을 찾아갔다가 그녀가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이상히 여긴다. 클레멘타인이 자신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웠다는 것을 알게 된 조엘은 분노에 차 자신 역시 그녀와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기억 삭제 클리닉 라쿠나를 찾아간다. 기억이 없으면 그에 따르는 고통도 사라지리라 상상하면서.
비록 영화는 모든 기억이 사라진 후에도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는 희망적인 결말로 마무리되지만, 실제 이런 일이 미래에 실현된다면 결과가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방과 나눴던 기억이 없다면 그가 내게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기억은 나다움을 보존하는 근본이기에 사람들은 일기를 쓴다. 일과 감정, 생각을 생생하게 담는 그릇이다. 비록 주관이라는 필터를 거친 불완전한 방식이지만, 과거의 일기는 몇 년 뒤 다시 훑어볼 때 통찰과 성장의 연료로 쓰인다. 만약 기억도 일기도 없다면 매번 오늘에만 갇혀 휘발되는 즉물적이고 얄팍한 삶을 살지도 모른다.
개인의 기록에 해당하는 것이 ‘일기’라면 전문 기록, 기술 자료, 연속간행물, 단행본, 10년사, 50년사 등은 그 범위를 전문성·기관·역사로 확장한 결과다. 개인의 기록과 달리 조직이나 사회의 공식 자산이 되며, 세대를 뛰어넘어 후대의 역사와 정보, 지식 발전에 영향을 미친다.
한명원 실장은 1993년에 연구소에 입소해 도서관과 기록관에서 기술정보자료의 수집·정리·보존·활용 분야에서 약 33년간 일해 왔다. 현재는 국방과학기술 분야 전문 도서관·기록관 발전을 위한 필요 자료를 수집 및 가공하는 ADD 기술정보실을 담당하고 있다.
2027년 완공을목표로 건설 중인 스마트 국방기술정보관 조감도
ADD 기술정보실은 일반적인 도서관과 달리 미래 첨단무기체계와 핵심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기획 단계부터 생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형의 자료를 다룬다. 기술자료, 단행본, 웹 DB 등 약 250만 건의 인쇄·전자자료, 1,355만 건에 달하는 전자문서, 종결사업 산출기록물, 영상기록물, 비밀기록물 등을 관리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은 없지만, 연구소 지식 자산의 장기 보존과 활용을 위해 맡은 바 업무를 묵묵히 수행해 왔다. 이 같은 노력은 전문도서관 분야에서 2025년 도서관 운영 우수도서관 문화체육부 장관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저희 기술정보실원들은 각자가 자기 역할을 알아서 잘 수행합니다. 어려울 때 서로 파이팅을 외쳐주고, 업무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영혼을 갈아넣기도 하고요. 제가 입소했을 때 관심과 응원으로 지켜봐 주셨던 선배님들,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해 주던 동료·후배님들, 모두 감사할 뿐이지요.” 그중에서도 ADD 소사는 연구소의 방대한 자료를 모아 균형 있게 편찬하는 사업으로, 연구소의 역사와 발자취를 10주년마다 기록한다. 2020년 8월에 50년사(제4권)가 편찬되었고, 2030년에 60년사(제5권)를 낼 예정이다.
“소사는 연구소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헌신해 온 연구소원들의 땀과 눈물이며, 자주국방의 초석이 되는 사명감과 ADD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중요한 기록물이죠.”
연구의 성공뿐 아니라 실패도 담는 만큼 후배 연구자들을 위한 명확하면서도 투명한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는 소중한 미래 자산이다. 한명원 실장은 이러한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 ‘기록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다’라는 문장으로 축약했다.
“제 인생 드라마가 김은숙 작가의 <미스터 션샤인>(2018)이거든요. 아무개 의병들의 이야기가 투영된 이 역작 드라마가 만들어진 계기는, 작가가 역사책 어느 페이지에서 발견한 의병들의 사진이었다고 해요. 기록이란 기억을 붙들어 주고 사라질 수도 있는 것들에 존엄을 부여하며 시간을 초월한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살아 있었다는 증거죠.” 그렇다면 기록은 어떻게 남겨야 할까. 그는 기록의 객관성과 주관성을 모두 확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삼국사기>(김부식)와 <삼국유사>(일연)를 예로 들어볼게요. 하나는 정사(正史)고, 하나는 야사(野史)죠. 그 두 가지가 모두 남아 있기에 우리는 그 시대의 생활상을 더욱 입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한명원 실장의 시선은 미래로도 향한다. 2024년 1월에 사업이 승인되고, 2027년 완공 예정인 스마트 국방기술정보관. 이곳은 편의성, 개방성을 개선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할 전망이다. 먼저 복지관과 직접 연결되는 통로를 마련해 소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했고, 24시간 개방으로 시간적 제약 없이 연구자료를 활용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
또 프로그램 운영 방향을 개선해 정보 제공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원 간 만남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지원할 방침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카리코 박사와 와이즈만 박사가 복사기 앞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이 만남이 mRNA 백신의 시초 논문을 탄생시킨 결정적 사건이었죠. 이처럼 스마트 국방기술정보관이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 자유롭게 생각을 나누며 그것이 창의적인 연구로 이어질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돌아보니 평생을 기록 분야에서 일했다는 한명원 실장. 그가 진로를 정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다. 인생무상을 느끼며 방황하던 고등학생 시절,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라는 문구로 큰 위안을 받았다. 책에 대한 사랑은 문헌정보학과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이후 ‘기록이 없는 것은 곧 역사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보고 정보 체계를 디지털화하고 수많은 자료를 후대를 위해 남긴 모 대통령의 행보를 접하며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겼다.
“역사는 기록한 자의 몫이죠. 우리는 (정확한) 진실이 뭔지는 모릅니다. 기록이 그렇게 남겨져 있으니 후손인 우리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에요. 하나의 사건은 한 가지가 아닌 다양한 측면을 포함하고 있으니 이와 관련한 자료를 다방면으로 남겨야 합니다. 그래야 후대 사람들이 그걸 확인하고 진실이 뭔지 가늠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우수 도서관 운영으로
2025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