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난(遭難)의 식탁,
자연이 내어준 한 끼
글. 편집실 사진.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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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언제나 먹을 것을 품고 있다. 다만 조난 상황에선 그것을 찾는 눈과 익히는 손이 필요하다. 한국의 산과 계곡, 바다 그리고 세계의 계곡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원시 식탁’을 탐구했다.
칡·도토리·나무 속껍질
겨울 산, 조난의 식탁은 더욱 단순해진다. 땅은 얼고 먹을거리는 자취를 감춘다. 그 속에서도 끝내 생명을 내어주는 식재료가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동북아시아 산지에서 겨울에 가장 먼저 확보할 수 있는 식량은 칡이다. 잎은 사라졌지만, 양지바른 남사면이나 도로변, 개울가에서 굵게 감긴 덩굴을 따라가다 보면 땅속에 뿌리가 숨어 있다. 덩굴은 오른쪽으로 감기고, 굵을수록 뿌리도 튼실하다. 마른 줄기를 따라 손이나 돌로 30~50cm 정도 파내면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겨울 칡은 전분 함량이 높아 포만감이 크다. 생으로도 먹을 수 있지만, 얇게 썰어 불에 굽거나 재 속에 묻어 익히면 단맛이 돌고 소화 부담도 적다. 물이 있다면 삶아 차처럼 마시거나 죽처럼 끓여 먹을 수도 있다. 도토리는 가을에 많이 구할 수 있으나 낙엽 아래 낙과가 남아 있는 경우가 있어 겨울에도 채집이 가능하다. 참나무 아래 낙엽층을 조심스럽게 뒤지면 단단한 껍질을 두른 도토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생으로 먹는 것은 위험하다. 타닌 성분이 강해 탈수나 구토를 유발할 수 있으므로 껍질을 벗기고 흐르는 물에 하루 이상 담가 떫은맛을 빼야 한다. 이후 구워 먹거나 빻아 죽으로 끓이면 안전하다.
모든 것이 끊긴 상황에서 나무의 속껍질은 마지막 식량이 된다. 보릿고개 시절엔 소나무 속껍질(송피)을 벗겨 죽을 끓였고, 북한과 서양의 혹한기에도 자작나무·느릅나무나 수피는 귀한 자원이었다. 먹을 수 있는 부분은 딱딱한 겉껍질 안쪽의 부드러운 속껍질이다. 손톱이나 돌조각으로 긁어내면 얇게 벗겨지고, 삶거나 끓이면 쓴맛이 줄고 소화도 용이하다.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이어주는 미미한 단맛이다.
단, 국내에선 주목나무·버즈나무·옻나무·철쭉, 해외에선 야생 체리나무·유칼립투스 등은 독성이 있어 절대 먹지 말아야 한다.
칡뿌리
도토리
나무 속껍질
다슬기·민물고기
겨울 산골의 계곡은 얼어붙은 듯 보여도 여전히 먹거리를 구할 수 있다. 맑은 물이 흐르는 바위 밑에는 다슬기가, 얕은 돌 틈에는 피라미나 버들치 같은 민물고기가 숨어 있기 때문. 손으로 조심히 돌을 들추거나 바지통이나 옷소매로 만든 간이 통발을 물살에 걸어두면 한 끼 식재료가 모인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나뭇가지로 V자형 어살을 만들어 물고기를 유인할 수 있다. 물살이 안쪽으로 흐르도록 설치하면 기다림이 곧 수확이 된다.
페트병이 있다면 입구를 깔때기 모양으로 만든 뒤 으깬 조갯 살이나 곤충을 미끼로 넣어 포획 틀을 만들 수 있다. 단, 미끼는 추운날씨에도 하루 이상 두면 부패할 수 있으니 매일 교체해야 한다. 채집한 다슬기는 반드시 끓여 간흡충 감염 위험을 차단해야 하며, 민물고기 역시 중심부까지 충분히 익었는지 꼭 확인하고 섭취해야 한다. 겨울의 불은 귀하고 불안정하니 식재료를 익힐 땐 더욱 신중해야 한다.
해조류·조개류
겨울의 해안선은 얼어붙은 듯 보여도 여전히 한 끼를 품고 있다. 썰물 무렵 드러난 갯바위와 조간대에서는 해조류와 조개류를 맨손으로 채취할 수 있다.
파래는 엷은 초록빛을 띠며 납작한 잎 모양으로 바위나 모래에 넓게 퍼져 있고, 청각은 사슴뿔처럼 굵고 갈라진 줄기가 특징으로 겨울에 제철을 맞는다. 매생이는 실타래처럼 떠다니며 파도가 잔잔한 해안 가장자리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손이나 조개껍데기로 긁어 떼어내어 바닷물에 흔들어 씻은 뒤 끓여서 섭취하는 것이 안전하다. 운이 좋다면 해안 가까이의 바위 틈에서 자연산 돌미역을 발견할 수도 있다.
겨울 해안의 단백질 자원도 적지 않다. 홍합은 그늘진 갯바위 틈에 군데군데 붙어 있어 손이나 조약돌로 쉽게 채취가 가능하다. 바지락은 진흙이나 모래 속에 숨어 있는데, 손끝으로 느껴지는 껍질의 감각을 따라 찾는다. 민물이 스며드는 갯골 주변이 특히 좋다. 소라는 바위틈이나 해조류 군락 근처에서 잘 보이며, 무리를 이루는 경우도 있어 몇 마리만 발견해도 주변에 더 있을 가능성이 크다. 모든 조개류는 바닷물에 이물질을 헹군 뒤 반드시 끓이거나 구워서 먹어야 하며, 겨울이라 해도 안전을 위해 날것 섭취는 피해야 한다.
어살·통발
조난 상황에서 시간이 허락된다면 간단한 덫으로도 식량을 확보할 수 있다. 플라스틱병이나 유연한 나뭇가지를 깔때기형으로 엮으면 통발이 된다. 입구 안에 으깬 조갯살이나 곤충을 미끼로 넣으면 냄새에 이끌린 작은 물고기들이 스스로 들어온다. 보다 넓은 범위를 노릴 수 있는 어살은 돌이나 나뭇가지를 V자 형태로 배열해 물길을 좁히는 방식이다.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 물고기의 습성을 활용한 원시 덫으로, 설치 후엔 그저 기다리면 된다. 물살이 완만하고 바닥이 드러나는 계곡이나 하천이 적지이며, 미끼는 부패하지 않도록 하루에 한 번씩 교체해야 한다.
조난의 식탁은 결국 인간이 자연과 맺은 가장 오래된 약속이다. 물을 따라 눈을 낮추고 덫을 놓고 기다리면 음식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산의 나무와 계곡의 흐름, 바다의 썰물은 모두 같은 말을 건넨다. 생존의 의지가 있다면 자연은 언제나 먹을 것을 내어준다.
통발
어살
통발
①
플라스틱병이나 캔의 입구를 자른 뒤 거꾸로 끼워 깔때기 형태로 만든다. 없다면 유연하고 큰 나뭇가지로 원통과 깔때기 형태의 프레임을 만든다. 끈 대신 풀줄기나 넝쿨로 묶는다.
②
미끼는 으깬 다슬기살이나 조갯살, 벌레 혹은 쉽게 구한 야생 열매를 넣는다. 하루 한 번 교체해야 미끼가 썩지 않는다.
③
계곡이나 하천의 물살이 완만한 곳에 통발 입구가 물살 방향을 향하게 설치하고, 돌이나 끈으로 틀을 고정해 움직이지 않게한다.
어살
①
손쉽게 꺾을 수 있는 나뭇가지를 촘촘히 땅에 박아 넓은 V자 형태로 만들어 물고기를 몰 수 있게 한다.
②
안쪽 끝에 나뭇가지나 돌로 벽을 세워 더 작은 물고기를 가둘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채집 가방
①
바지통, 소매, 티셔츠 등의 한쪽 끝을 묶는다.
②
손가락 두께의 휘어지는 나뭇가지를 둥그렇게 구부려 입구에 껴놓으면 채집 시 편리하다.
⚠︎ 주의
불은 아무 데서나 피울 수 없다. 국립공원·도립공원·산불위험지역은 법적으로 취사 금지 구역이다. 또 모든 야생 식재료는 충분히 익혀 먹어야 하며, 독성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을 땐 먹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