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딛고 달린
배우의 시간
‘계속’ 달리는 고한민
Ko Han-min
글. 편집실 사진. 박기현 작가
글. 편집실 사진. 박기현 작가
‘조선 파파고’. 한 배우가 분한 왜군 통역사 소이치로를 향한 사람들의 호평이다. 영화 <전,란>에서 왜군 장수와 조선 의병 간 화려한 액션 장면을 살려준 건 수준급 일본어와 놀라운 연기 실력으로 영화에 경쾌함을 더해 준 고한민 배우였다.
칸딘스키, 파울 클레, 윌리엄 블레이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두 서로 다른 예술 영역을 동시에 탐구한 인물들이다. 칸딘스키는 음악에서 영감을 얻어 추상미술을 펼쳤고, 파울 클레는 음악과 미술 문학을 넘나들며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시와 회화를 함께 추구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술과 과학이 서로를 확장시킨다고 믿었다.
고한민 배우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두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연기에서는 <슬기로운 의사생활2>, <어사와 조이>, <지금 우리 학교는>, <기생수: 더 그레이>, <우씨왕후>, <전,란>으로 주목받았고, 러닝은 최근 춘천마라톤 풀코스에서 개인 최고 기록(PB, Personal Best) 2시간 43분 21초를 기록하며 놀라운 기량을 발휘하고 있다. 42.195km에 달하는 거리를 3시간(일명 SUB-3) 이내 완주하는 기록은 아마추어 러너 중 상위 5~10%만이 달성하는 기록이며, 2시간 40분대는 러너 상위 1% 전후로 1km를 약 90초 만에 달려야만 가능하다.
한 분야에서 최고점을 찍은 뒤 다른 분야로 옮겨가는 예는 종종 있다. 하지만 그는 조금 독특하다. 러닝과 연기에서 대중에 주목받게 된 시점이 거의 비슷하다. 물론 그렇기에 어려움도 있다. 중요한 마라톤 대회가 있는 시기가 새로운 드라마 출연과 겹쳐 어느 한쪽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는 것. 그러나 전반적으로 두 분야는 각각 반대 영역의 동력이자 더 잘할 수 있는 계기다. “러닝을 하는 도중 맡은 드라마나 오디션의 대사 고민이 풀리기도 하고, 방향이 잡히기도 해요. 그래서 상대방 배우의 대사를 들으면서 뛰기도 합니다.”
고한민
연기자·러너
고한민 배우가 알려주는 러닝 전 준비운동 5단계 ① A스킵: 빠르게 무릎을 들어 올렸다 내린다. ② B스킵: 무릎을 들어 올린 뒤, 다리를 앞으로 부드럽게 차며 내려놓는다. ③ C스킵: 다리를 옆으로 들어 올렸다 내리고, 다시 앞으로 올렸다 내린다. ④ 토 터치: 곧게 뻗어 들어 올린 다리의 발가락을 손으로 가볍게 터치한다. ⑤ 스트레칭: 다리를 넓게 벌리고, 허벅지 안쪽과 엉덩이 근육 등을 충분히 늘려 준다.
(과거 러닝을 금지당했었느냐는 질문에) “당시에 의사가 말했죠. ‘당신은 러닝은커녕 다시는 운동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20십 년 전, 아직 사회생활도 제대로 못 해본 팔팔한 스무 살 청년에게 의사는 “운동을 하면 안 된다”라고 잘라 말했다. 부상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전방, 내측, 외측, 성한 곳이 없었다. 끊어지고, 파열되고, 찢어지고. 수술로 긁어낸 연골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무릎은 제대로 굽히지조차 못했다. 체대를 다니고 있었고, 운동이라는 한길만 걸어온 사람에게 더없이 잔인한 선고였다. 이후로 줄곧 운동은 포기하고 살았다. 부활의 계기는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집안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체중이 증가하자 2020년 5월 20일에 러닝을 시작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 근처에서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는 정도였다. 본인이 ‘러닝’을 한다는 인식이 강하지 않아 이렇다 할 장비도 없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쟀고, 러닝화도 3만 원짜리 중고로 구했다.
연습은 복리형.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조금씩 거리를 늘렸다. 10분은 20분이 되고, 5km는 7km가, 다시 10km가 됐다. 100일이 지난 어느 날, 10km를 50분 만에 뛰니 자신감이 붙었다. 성장의 비결은 ‘그만두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피곤하니까 오늘만 하루 쉴까 하는 마음에 지지 않고 꾸준히 신발 끈을 매고 당현천으로 나갔다. 쉬지 않고 쌓인 날들은 무섭도록 오르는 기록과 탄탄한 체력이 되어 돌아왔다.
“러닝만큼 정직한 게 없죠. 노력한 만큼 나오니까요. 세상 모든 게 러닝 같았으면 좋겠어요.”
그가 풀코스 마라톤을 3시간 54분 만에 완주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1년 만인 2021년 5월. 기록은 연신 상승 곡선을 그렸다. 올해 도쿄 마라톤에서는 2시간 48분 52초, 춘천마라톤에서는 2시간 43분 21초를 기록했다. PB를 경신하고, 또 경신했다.
그가 달릴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의사들은 의문을 표한다. “희한하다. 이 상태로 어떻게 달리지?”라며 놀라워한다. 무릎에 완충작용을 하는 연골이 없는 상태에서 주변 근육을 길러 뛴다. 단순히 뛰는 데 그치지 않고 아마추어 러너 최상위권의 기록을 내며.
“사이코패스, 살인자, 의사, 변호사, 북한 사람까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게 매력적이에요. 어떤 역할을 맡든 ‘어떻게 살았을까’, ‘왜 이 말을 할까’ 고민하는 과정이 너무 즐겁고요.”
무명 시절이 길었다. 대학로 무대에 선 다음 날 오전에 농수산물을 배달하고, 오후 2~4시에 프로필을 잠깐 돌린 뒤 다시 저녁 배달 일을하며 지낸 18년. 함께하던 동료들은 하나둘 ‘현실’을 얘기하며 떠났다.
“중간에 그만두고 다른 일로 변경하기도 하고, 특히 결혼을 계기로 먹여살려야 할 식구가 생가고 책임감을 갖게 되면서 배우를 그만두는 친구가 주변에 많았죠.”
빈자리에 휩쓸리지 않아야 했고, 혼자 견디는 강건함이 있어야 했으며 “오래 연기했는데 왜 TV에 안 나오느냐”는 비수 같은 말을 견뎌야 했다. 그를 지탱해 준 것은 주변 친구와 가족의 믿음과 헌신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시간이 왔다. 영화 <전,란>(감독 김상만)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자 넷플릭스 오리지널인 이 작품은 시청 시간 누적 역대 6위를 기록하는 등 각별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의 주인공은 통역사’라는 찬사가 나올 정도로 그의 물오른 연기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다.
그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을 러닝과 마찬가지로 ‘꾸준함’에서 찾았다. 통증과 부상 등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처음 열정을 거두지 않고 계속하는 마음. 또 한 가지는 자신이 정해 놓은 한계를 넘는 것이었다. 러닝을 처음 시작할 때 ‘내가 뛸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던 것처럼 연기를 펼칠 때 역시 자신의 캐릭터 해석이 감독과 스태프, 관객에게 통할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는 그러한 두려움의 본질은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있다고 짚었다. 다짐만큼 이루지 못하거나 실패했을 때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주변에서 비난받는 것을 피하고 싶기에 자신의 행동 범위에 미리 한계선을 긋는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아’라고,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의 행동 범위에) 선을 그어 두었죠.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저 자신에게 질문했어요. ‘네 한계를 네가 스스로 정해 버리면 어떻게 해?’ 나 자신에게 채우고 있던 자물쇠를 풀고 조금만 더 도전해 보고 조금만 더 나아가 봤더니 다양한 제가 보이기 시작하고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들이 생겼습니다.”
Profile.
고한민 배우 달리는 배우 고한민. 대학로에서 <매직타임>, <에쿠우스> 등 여러 작품에 참여했고, 2012년 영화 <개들의 전쟁>으로 데뷔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2>, <지금 우리 학교는>, <기생수: 더 그레이>, <전,란> 등에서 인상적 연기를 보여줬다. 스포츠 예능 「뛰어야 산다」에 출연했고 러닝 노하우를 전하는 유튜브 채널 <고배우TV>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