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July + August Vol. 197
DEFENSE IN NUMBERS

세 번째 이야기 1990년대:
도약의 시간,
자주국방을 향하다

글. 편집실  
일러스트. 챗GPT, shutterstock, 나무위키

세 번째 이야기 1990년대:
도약의 시간, 자주국방을 향하다

창립 20주년을 맞은 1990년 국방과학연구소. 조직의 핵심 중추로 성장한 김민준 실장은 육해공 전방위를 아우르는 대대적인 국산화 사업을 진두지휘합니다. 무수한 실패와 도전을 거듭하며 신형 자주포와 교량전차, 항공기 전자전 장비와 국산 어뢰 개발에 잇달아 성공한 이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조명합니다.

국방과학연구소 56년 여정의 좌표를 소설로 읽다

도면도 없이 40일 만에 병기를 복제해 낸 ‘번개사업’의 긴박한 순간부터 한국군 독자 정찰위성 ‘425위성’을 탄생시키기까지, 지난 56년의 눈물겨운 사투를 소설로 만납니다. 국방과학연구소 56주년 연재소설 ‘숫자 너머의 이야기’는 시대를 빠르게 읽어내는 눈으로 누구보다 앞서 자주국방의 길을 개척해 온 선구자들의 숭고한 여정을 기록합니다. 과거의 유산으로 미래의 평화를 일구는 이들에게 바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1 새벽을 깨우는 눈

무내미의 매서운 겨울바람도 민준이 쥔 서류 봉투의 열기 앞에서는 힘을 잃었다. 서류의 내용은 화력 중심의 무기체계 실정을 한참 넘어서고 있었다. 민준이 받아든 기밀이란, 전자기파를 관장하며 대한민국 영토 전역을 감시할 첨단 전자전을 설계하는 청사진이었다. 구조 조정의 아픔을 달랠 틈도 없이 시대는 이미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미래 전장으로 그들을 몰아갔다.
새해와 함께 연구실은 다시 불면의 밤을 맞았다. 지상군의 든든한 방패가 될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 천마와 자주대공포 비호, 그리고 공군의 생존을 책임질 전자방해책 장비까지. 독자적 무기체계를 선보이기 위한 가혹한 시험이 본궤도에 올랐다. 수백, 수천 번의 실험으로 미세한 오차를 잡아내던 이들은 이제 나노 단위로 움직이는 전자신호의 잡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무수한 시도가 서류 더미로 쌓이는 중이지만 민준은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는다. 실패와 성공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2 무내미에 부는 여름 바람

국방과학연구소에 입소한 지 어느덧 20여 년. 팀의 수장이 된 민준은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빛바랜 수첩을 꺼낸다. 그러고는 첫 장에 적힌 글씨를 손으로 쓸어 본다. '380g, 사과형'.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선명한 장면이다. 20년 전, 한강 백사장에서 한국군 체형에 맞는 수류탄을 설계하기 위해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돌멩이를 집어 던지던 청년 연구원의 치기와 오기는, 차츰 조국 수호에 대한 엄숙한 사명감으로 바뀌어 갔다. 별이 쏟아지던 어느 여름밤, 무내미에는 이미 어둠이 내린 지 오래지만 연구소의 불빛은 여전히 형형하다.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전 세계에 군비 축소의 바람이 불어오던 1990년대 초반, 한국 국방산업은 독자적 기술 자립이라는 중대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외국산 무기 도입의 압박 속에서 우리 힘으로 영토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무내미의 새벽을 밝히던 시절이다.

#3 조금도 허용할 수 없는 오차

민준은 밤을 자주 지새웠다. 연구소의 중추로 육해공을 아우르는 자주국방 사업을 진두지휘하기 때문이다. 그의 양어깨에는 1980년대 구조조정의 시련을 지나 '1990년대 선진 무기 도약 프로젝트'라는 막중한 임무가 지워져 있었다.
시시각각 들려오는 걸프전 뉴스는 민준의 열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첨단 정밀무기의 위력을 증명하기 시작한 시대, 대한민국 국방은 단순 모방을 넘어 고도의 복합 무기체계 독자 개발로 나아가는 기술 도약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실장님, 신형 155mm 자주포의 외장 조립과 궤도 연동 시험 준비를 마쳤습니다. 공군 항공기용 전자방해책 장비의 주파수 데이터도 도달했습니다.”
후배 연구원의 보고에 민준은 안경을 고쳐 썼다.
“기존 수입 장비보다 탐지 거리가 25% 늘어나고 영상 선명도가 3배나 뛰어난 전방감시 열상장비(TAS-970K) 개발도 막바지입니다! 전차의 눈이 되어줄 포수조준경(KGPS)과 소리 없이 잠수함을 낚는 예인음탐기 ‘흑룡’ 테스트 데이터도 양호합니다.”
민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전자전 역량이 승패를 가를 미래 전장의 진화가 눈앞에 그려졌다. 무내미와 소원들의 밤은 미래를 선점하려는 집념으로 하얗게 타올랐다.

#4 시련 속에서 단단해지는 마음

육군의 진격을 책임질 신형 자주포와 기갑부대의 기동성을 높일 교량전차, 그리고 공군의 역량을 제고할 항공기 전자전 장비까지. 어느덧 우리 기술로 국산 방어망을 구축하는 거대한 작업이 완성 궤도에 접어든다. 방위산업의 구조가 단순 조립 생산에서 첨단무기의 독자개발체제로 전환하는 시기, 국방 연구개발 예산이 대폭 늘어나고 국산 무기 도입에 힘이 실리면서 무내미 연구실은 자주국방을 실현할 핵심 기지가 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해양시험장 설치와 기동시험장 준공, 새 연구동 설립까지 마친 연구소는 이제 소원들이 마음껏 가공할 무기를 실험하고 데이터를 수집할 든든한 터전으로 거듭났다. 나아가 하늘을 지킬 새로운 활인 휴대용 대공유도무기 신궁, 잠수함 잡는 경어뢰 청상어, 우주 시대의 문을 열 군 위성통신체계, 그리고 지상전의 수호신이 될 차기 보병전투장갑차 K-21 개발이라는 거대한 대장정에 차례로 닻을 올렸다.
순탄치만은 않은 길이었다. 해외의 검증된 완제품을 수입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고 안전하다며, 사방에서 흘러나오는 국산화 사업을 불신하는 목소리는 연구원들의 사기를 꺾었다. 그럴 때마다 민준은 더욱 냉정하게 시험 데이터를 파고들었다. 개발 중인 어뢰가 유도신호를 놓치고 심해로 사라지거나, 핵심 회로가 잡음 때문에 새까맣게 타버려 온 연구실이 침묵에 잠길 때도 그는 주저앉으려는 후배들의 어깨를 다독였다.
“다들 고개 들어. 사라진 건 종이와 고철뿐이야. 우리가 오늘 흘린 땀과 실패의 데이터는 고스란히 남아 결국 우리 군이 쓸 독자 기술체계의 뼈대가 될 걸세.”

#5 실패의 데이터를 쌓는 연습

민준은 흔들리는 팀원들의 중심을 잡았다. 1970년대 백곰 미사일의 레이더 고장을 담뱃갑 은박지 하나로 해결하고, 1980년대 현무 미사일을 발사하기 위해 폭설이 내리는 해변에서 밤을 지새우던 그의 집념이 다시금 살아났다. 마침 정부가 무기 획득 절차를 정비하고 산학연 협동 연구체계를 본격적으로 가동하던 시기였다. 국방과학연구소가 설계한 기본 틀 위에서 국내 방위산업 기업들이 부품 제작과 공정 관리를 나누어 맡으며, 연구실의 실험 데이터가 실제 군수공장의 대량 양산 궤도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실험실에 고여 있던 숫자와 수식들은 거대한 제조 공정의 현실과 거세게 부딪히기 시작한다. 매 순간이 고비였다. 연구원들은 도면을 들고 전국의 생산 현장을 찾아가 현장 기술자들과 밤새 부품 규격을 조율하고 품질 기준을 맞추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부품의 내구성을 테스트하고 오차를 조율하며 수백 번의 회로 수정과 수만 번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거친 끝에, 마침내 부품 생산과 체계 조립의 모든 공정이 어긋남 없이 맞물려 돌아갔다.
1998년 동해 해상, 긴장감 속에 발사된 어뢰가 거친 파도를 날렵하게 가르며 나아간다. 수차례 유도신호를 놓치며 깊은 바닷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던 과거의 실패를 딛고, 어뢰는 마침내 수중 표적을 정확하게 타격했다. 한국 최초 독자 기술로 제조한 중어뢰 백상어가 시험 발사에 성공한 순간, 연구실을 짓누르던 무거운 침묵은 순식간에 환희와 환호로 바뀌었다.

#6 태극 문양을 달고 세계 무대로

세계지도 한 귀퉁이의 작은 연구실에서 싹튼 기술이 훗날 전 지구를 흔들 K-방산 수출의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맨땅에서 일군 자주국방의 결실에 회한과 자부심이 교차하던 새천년의 문턱.
“실장님, 1999년 거여동 연구동 준공식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그리고 방금 보안 라인으로 들어온 문건 전달했습니다.”
늦은 밤, 민준의 모니터에 정체불명의 암호화된 기획서가 날아든다. 화면에 떠오른 건 무기 체계가 아닌, 우주와 사이버 공간을 가리키는 미지의 좌표다. 자주국방의 기틀을 완성했다는 안도도 잠시, 2000년대라는 새로운 시대가 무내미의 밤을 다시 삼키기 시작했다.

<무내미> 다음 호에서 2000년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1990년대 국방과학연구소의 기술적 도약


국방과학 미니 낱말 퍼즐

가로 낱말 풀이

대한민국 국방부 산하의 국방과학기술 전문 연구기관. 소설 속 주인공들이 새벽을 밝히며 수중 유도무기와 첨단 장비를 독자 개발한 '무내미 연구실'의 실제 배경인 곳. 적의 레이더, 미사일, 통신망 등에 강력한 교란 전파나 유인 신호를 보내 아군 무기체계의 생존성을 보장하는 핵심 현대전 기술. 소설 속 항공 전자장비 개발의 핵심 요소를 뜻하는 말. 군대나 전차, 장갑차 등의 무기체계가 전장에서 얼마나 신속하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능력. 작전의 성패를 가르는 군사적 핵심 요소. 1990년대 초반 개발에 착수해 수많은 시험 발사 실패를 딛고 동해 심해에서 표적 타격에 성공한,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 개발 중어뢰 이름.

세로 낱말 풀이

국방과학연구소나 방위산업체 등에서 무기체계의 연구, 개발, 생산 및 군수품 조달 업무에 종사하는 인력을 통칭하는 말. 소설 속 민준과 무내미 연구원들이 이에 해당. 적의 시계를 차단하거나 아군의 이동 경로를 은폐하기 위해 순식간에 짙은 연기를 뿜어내도록 고안된 화학 탄약. 개인이 휴대하며 전투를 수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화기. 도면 한 장 없던 시절, 우리 연구원들이 맨손으로 분해하며 치수를 재던 국산 무기 개발 역사의 출발점. 한국 독자 기술로 탄생한 중어뢰 백상어가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딛고 마침내 첫 시험 발사에 성공한 바다.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처럼 불안정한 원자핵이 스스로 붕괴하면서 고에너지 전자기파나 입자를 방출하는 물리적 성질. 현대전에서 화생방 방호체계의 주요 감시 대상. 잠수함이나 대형 함정을 타격하기 위해 제작된 거대하고 강력한 수중 유도무기. 소설 속 백상어가 대표적.

정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