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품고, 전장을 딛고
배우 지승현
JI SEUNGHYUN
글. 하경헌(스포츠경향 기자)
사진. SM C&C, KBS
글. 하경헌(스포츠경향 기자)
사진. SM C&C, KBS
KBS1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의 프리젠터로 활약하고,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구국의 영웅 양규 장군을 완벽히 재현해 울림을 준 배우 지승현을 만났습니다. 56년간 묵묵히 한길을 걸어온 국방과학연구소처럼, 치열한 노력과 인내로 지금의 자리에 다다른 그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 봅니다.
장군의 눈빛은 결연했다. 코앞까지 밀려드는 적군의 함성이 고막을 흔드는 순간에도, 산발적 공격이 전장을 짓이길 때도, 무참히 짓밟힌 이 땅을 굽어보는 찰나에도. 2024년 1월 7일 KBS2에서 방영한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16회는 양규 장군으로 분한 배우 지승현의 무대였다.
흥화진(현재 평안북도 의주 인근) 전투에서 거란군을 막아낸 양규 장군의 위풍당당한 등장은 고려사에 대한 시청자의 인식을 바꾸는 큰 사건이었다. 이제껏 고려 시대를 다뤄온 여러 드라마에서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양규 장군의 모습은 배우 지승현의 열연으로 형형하게 살아났다.
지승현은 <고려 거란 전쟁>의 양규 장군 덕분에 데뷔 후 처음으로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2023년 <KBS 연기대상> 남자 인기상과 장편 드라마 부문 남자 우수상, 2024년 <제15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남자 우수연기상을 받은 것이다. 2008년 배우의 길에 들어선 이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은 캐릭터 양규 장군은 그에게 연기 인생을 건 도전이었다.
역할을 제안받기 전까지 인물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양규 장군과 고려 시대 사료를 훑어 내리며 역사를 공부하고, 국궁을 주 무기로 북방을 지킨 서사를 충실히 따라갔다. 전장 앞에 선 장군의 심중을 헤아릴 때에는 학군장교로 야전을 누빈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청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전쟁과 참전을 상상해 봤을 겁니다. 저 역시 DMZ 남방한계선의 철책을 지키는 전초 GOP에서 근무하며 고된 임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일을 떠올리면서, 북쪽 최전방에서 복무하며 고생하셨을 양규 장군의 마음을 생각했습니다. 장군의 활약을 보다 섬세하게 표현하기 위해 국궁을 배우면서 우리 무예와 기술의 우수성을 새삼 느끼기도 했죠.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기회였습니다.”
방영 당시 폭발적 인기를 모은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특수부대 요원 안정준 상위, <미스터 션샤인>의 의열단 단원 송영, 여말선초의 격변기를 그린 <나의 나라>의 무관 박치도 등 지승현은 유독 군인 역할을 자주 맡아왔다. 다채로운 장병의 면모를 연기한 그에게 특별한 역할이 주어지기도 했다. KBS1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프리젠터로 활약하게 된 것이다. 프로그램의 사회자인 그는 인공지능이나 증강현실 등 최첨단 기술로 구현한 전쟁사의 한 장면 속에 들어가 역사적 인물을 몸소 연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독특한 연출과 지승현의 열띤 재연은 시청자가 역사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역사를 탐구하는 시간이 늘 즐겁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고려 공민왕을 중심으로 전개한 회차인데, <고려 거란 전쟁>에서 김숙흥 장군으로 호흡을 맞춘 배우 주연우 씨가 신돈 역할을 해주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침 <고려 거란 전쟁> 촬영팀과 함께해 더 뜻깊은 시간이었지요.” 철저한 사료 고증 절차와 각종 첨단 시청각 기술을 소화하느라 고생하는 제작진을 기억해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제 역할은 제작진이 오랜 시간 공들여 완성한 거대한 캔버스, 훌륭한 밑그림에 누가 되지 않도록 신중히 또 성실히 색칠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태양의 후예>부터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까지, 지승현은 수많은 작품과 방송을 통해 국방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위인들의 삶을 마주할 때면 가슴속에서 뜨거운 각오가 샘솟곤 합니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청년이 오랜 시간 품어온 꿈은 다름 아닌 배우였다. “어린 시절부터 연기자가 꿈이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영화 시장인 할리우드에 진출하고 싶어서 영문과에 갔고, 열심히 하다 보니 운 좋게 장학금도 탔죠. 아버지는 배우가 되겠다는 저를 반대하는 한편, 아나운서에 도전해 보라고 하셨어요. 그 시절엔 아나운서 학원과 연기 학원을 몰래 병행했죠.” 뉴스 전문 채널 아나운서로 합격한 그는 끝내 배우의 길을 선택했고, 2008년 영화 <거위의 꿈>과 <바람>에 등장하며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다. 2016년 <태양의 후예>로 주목받기까지 그는 8년이라는 긴 무명 시절을 버텨야 했다. 끊임없이 도전한 오디션은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이었고, 그는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 냈다. “사랑에 이유가 있을까요? 배우는 무얼 바라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으니 이보다 더 큰 행운도 없을 겁니다. 많은 이에게 카타르시스와 감동을 전달하는 게 제 숙명이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역할에 임할 때마다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지승현의 태도는 빠르게 변화하는 정세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연구에 정진하는 국방과학연구소와 닮아 있다. “인물에 깊이 이입해 상상하며 연구합니다. 이 사람이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또 어떤 방식으로 행동할까. 표정과 상황을 최대한 구체화해 봅니다.”
지승현과의 만남은 강건한 나라의 중요성과 이를 대중에게 알리는 ‘안내자’의 역할을 되새기는 뜻깊은 계기였다. 그 역시 이번 인터뷰로 국방과학연구소의 역할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됐다며, 지금 이 순간에도 치열하게 연구에 매진하는 연구원들에게 깊은 경외감을 표했다.
“세계평화와 안보를 설계하는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밤낮없이 대한민국의 튼튼한 방패를 만드는 여러분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양규 장군입니다. 여러분의 치열한 땀방울 덕분에 우리가 평화로운 오늘을 누립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겠습니다.”
그는 곧 공개할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삼도천택시>와 SBS <굿파트너 2> 등 다양한 작품으로 행보를 이어간다. “데뷔 18년 만에 첫 연기상을 안겨 준 양규 장군 역을 맡았을 때가 떠오르네요. 영화 <실미도>의 대사를 인용해 수상 소감을 전했습니다. ‘각자 맡은 일에 끝까지 책임을 다하면 나라는 저절로 잘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었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진정한 애국이라 믿습니다.”
Profile.
2008년 영화 <거위의 꿈>을 시작으로 영화 <바람>과 <퍼펙트맨> 드라마 <태양의 후예>와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연인>, <고려 거란 전쟁>, <굿파트너> 등에 출연했다. 2023년 <KBS 연기대상> 장편 드라마 부문 남자 우수상 <제15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남자 우수연기상, 2024년 <SBS 연기대상> 남자 조연상 등을 수상하며 배우로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현재 KBS1 다큐멘터리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프리젠터로 시청자와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