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마을 소년,
국방과학 역사를 기록하다
글. 강나은 사진. 박기현
글. 강나은 사진. 박기현
전북 순창의 산골 태자마을에서 자란 최순재 팀장이 모교 팔덕초등학교를 찾아 후배들에게 자신이 걸어온 ‘기록의 역사’를 들려주었습니다. 세계사 선생님을 꿈꾸던 소년이 사서가 되고, 다시 대한민국 국방과학의 역사를 지키는 기록 전문가로 성장하기까지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 봅니다.
- 팔덕초등학교 47회 졸업(1980년 졸업) - 국방과학연구소 기록관리팀장
뒷산 능선이 ‘임금 왕(王)’ 자를 닮아 태자(太子)라 부르던 마을이 있다. 소년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마을에서 학교까지는 4km였고, 소년은 1학년 때부터 그 꾸불꾸불한 길을 뛰어다녔다. 길 끝에 위치한 팔덕초등학교에는 칼을 찬 이순신 장군 동상이 아이들을 내려다보았고, 도서관 앞에는 하얀 ‘책 읽는 소녀상’이 자리해 있었다. 나라를 지킨 장군과 책을 읽는 소녀. 소년은 그 둘 사이를 매일 지나다니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앞날이 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소년은 훗날 대한민국 국방과학의 역사를 지키는 자리에서 기록의 책장을 넘기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책 읽는 소녀상과 최순재 팀장
이제 모교 팔덕초등학교를 찾은 최순재 팀장의 모습을 본다. 그는 10여 년 전 자신의 모교가 학생이 얼마 없어 곧 폐교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을 졸였다. 다행히 오늘날 팔덕초등학교 전교생은 49명, 순창군 면 단위 학교 중 가장 많은 숫자다. 반전의 계기는 4년 전 시작한 농촌 유학이다. 전북특별자치도교육청 지원으로 유학 온 가족이 지낼 집 여덟 채가 마을에 들어섰고, 도시에서 온 학생 21명이 이 지역 아이들과 한 교실에 앉았다. 순창중앙초등학교와 공동학구를 맺은 어울림 학교라 읍내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아이들도 있다. 현재는 대기자가 수십 명이지만, 팔덕초등학교에서는 유학생이 전교생의 절반을 넘지 않게 해 팔덕초등학교의 고유한 정체성이 흐려지지 않도록 했다.
‘책에서 꿈을 찾고 기록으로 미래를 만들다.’ 최순재 팀장이 준비한 강연 제목이다. 미사일과 잠수함, 무인기와 인공위성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신기했지만, 후배들의 눈이 가장 빛났던 대목은 선배의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이야기다. 그 시절 학교는 농사를 지었고, 낫을 가져오지 않으면 선생님은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4km 멀리 떨어진 집에 다녀오면 어느새 점심때였다. 어느 날 소년은 친구, 친구의 동생과 셋이서 학교 담장을 넘었다. “짜릿했어요. 마음은 불편했지만, 자유를 느낄 수 있었죠. 하루이틀은 재미있었는데, 나흘째 같은 반 친구가 이야기하더라고요. ‘학교에 오면 엄청 혼날 테니까 알아서 하래.’ 하고요. 나중에 부모님도 우리가 학교에 안 간다는 사실을 아셨고, 두려운 마음에 집에도 못 들어가는 상황이 되었지요.”
집에 들어가지 못한 다섯째 날 저녁, 마을 이장이던 아버지가 방송으로 아들을 찾았다. 동네 사람들이 손전등을 들고 이름을 불렀지만 세 아이는 들깻잎 밭에 엎드려 꼼짝하지 않았고, 별을 보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의 ‘자율 현장 학습’이 이어졌고, 소년의 성적표에는 ‘결석 13일’이라는 기록이 선명했다. 아이들은 최순재 팀장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최순재 팀장의 아버지는 새벽 4시면 지게를 지고 논밭으로 나갔다. 6·25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아버지가 삼 형제를 대학에 보내려고 겨울 농한기면 전주로 나가 힘닿는 만큼 일용직으로 일했다. 그런 아버지가 남긴 말이 있으니, “화학비료는 술과 같아서 과하게 뿌리면 탈이 나고, 퇴비는 밥과 같아서 많이 해도 소출이 많아진다.”였다. 거름으로 일군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아들은 이를 정직함에 대한 당부로 새겼다.
교직에 몸담았던 두 형의 영향으로 최순재 팀장은 세계사 교사를 꿈꿨지만, 사범대 진학에 실패했다. 실망이 컸지만 좌절할 순 없었다. 교사와 비슷한 일이 없을까 찾다 떠오른 것이 팔덕초등학교 도서관이었다. 책 읽는 소녀상을 보면서 다독가가 되기를 꿈꾼 순간이 떠올랐다. 최순재 팀장은 그렇게 문헌정보학과를 택해 사서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그 무렵 국방과학연구소가 사서를 뽑는다는 신문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1993년, 대학 4학년이던 최순재 팀장은 입사 시험에 통과했다. “한국에서 가장 앞서가는 전문 도서관에 들어왔다는 자부심이 컸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34년간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기술정보, 대외 홍보, 기록관리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왔다.
최순재 팀장은 거북선이 그려진 이순신 장군의 영화 포스터를 보여주며 설명한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싸울 때마다 이겼다는 걸 여러분은 어떻게 알죠?” 아이들이 대답했다.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렇다. 이순신의 승리는 <난중일기>, <조선왕조실록>, <징비록> 등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500년 전의 일을 지금 우리가 아는 이유는 기록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연구소에도 그런 기록이 있다. 보고서와 문서, 기록사진, 도면과 규격 같은 기술자료다. 무기는 한 번 만들고 끝나지 않는다. 다음 무기를 만들 때 그 자료가 다시 쓰인다. 최순재 팀장은 그 기록을 모아 관리하고, 전자기록관 시스템에 담아 연구원들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게 한다. “기록홍보를 통해 1970년 연구소 창설 이후 선배님들이 흘린 땀과 눈물을 기억하고, 그 가치를 소원들이 이어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가 아이들에게 보여준 손글씨 문서에는 미사일 그림이 그려져 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연구원들이 노트에 직접 써 내려간 개발계획엔 한국 최초의 미사일 백곰이 있었다. 겨울에 눈을 맞으며 백곰처럼 일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백곰이 안흥 종합시험장에서 시험 발사에 성공한 1978년, 최순재 팀장은 이 학교 5학년 학생이었다. 훗날 자신이 그곳에서 일하게 되리라는 것도, 그날의 기록을 자신이 관리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여러분도 꿈을 기록하고 이루어 가면 좋겠습니다. 기록은 지나간 것을 붙잡아 두는 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루고 싶은 것들을 노트 한 장에 빼곡히 적었다고 해요. 그 기록이 결국 꿈이 되었죠. 저도 4학년 때는 땡땡이나 치던 아이였지만, 도서관 앞 소녀상을 보며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던 그 마음이 저를 여기까지 데려왔습니다.”
소년은 마흔여섯 해 전 그 자리로 돌아왔다. 운동장의 흙은 잔디가 되었고 담장은 사라졌지만, 책 읽는 소녀상은 그가 올려다보던 그대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은퇴를 앞두고 지나온 길을 한 단어로 말해달라는 부탁에 최순재 팀장은 ‘감사’라고 답했다. 태자마을에서 태어나 이 운동장을 뛰어다닌 것,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좋은 동료들과 34년을 보낸 것, 그 모두가 고맙다는 뜻이었다.
최순재 팀장 앞에 앉아 있던 아이들도 언젠가는 저마다의 한 단어를 갖게 될 것이다. 그 단어가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금 이 학교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그 단어의 첫 줄이 되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권병조 | 교장 선생님
“우리 학생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줄 선배의 강연에 박수를 보냅니다.”
박상길 | 교감 선생님
“직업과 학교 생활에 대한 뜻깊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무척 좋았습니다.”
박건후 | 학생
“선배님이 학교 다닐 때에도 교문 앞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었다니 신기해요!”
최가은 | 학생
“<난중일기>를 통해 전쟁과 무기에 대해 기록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어요.”
김유신 | 학생
“백곰 미사일 이야기가 가장 좋았어요. 한국 첫 번째 미사일이라니 정말 대단해요.”
서연호 | 학생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가만히 떠 있다가 불꽃을 뿜으며 원하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무기예요.”
성실히 남긴 어제의 기록은 미래의 출발점이다. 최순재 팀장이 강연에서 후배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했다.
최순재 팀장 | 국방과학연구소
“모교에 오게 되어 기뻤습니다. 학생 수가 줄어 걱정했는데, 이렇게 활기를 되찾은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웠고요. 후배들이 흥미있고 좋아하는 것을 찾아 최대한 즐기고, 배려와 친절을 자연스레 몸에 익히며 자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