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September + October Vol. 198
TRIP WITH ADD

시간이 빚은 맛,
순창

글. 편집실   사진. 박기현, 한국관광공사, 순창군 문화관광, shutterstock

시간이 빚은 맛,
순창

전북 순창은 발효와 숙성의 고장입니다. 옹기에서 잘 익은 장의 풍미, 세월이 조탁한 절벽에 세운 용궐산 하늘길 잔도, 천년을 이어온 사찰과 고결한 불심. 시간의 힘을 증명하는 순창의 유산을 마주하며 인고와 숙성의 미학을 이야기합니다.

순창 한눈에 보기
[기후] 적은 강수량, 풍부한 일조량, 아침 안개와 한낮의 건조한 바람이 빚어낸 발효 환경 [지질] 용을 닮은 암벽 절벽, 수류와 자갈의 마모가 형성한 포트홀, 화강암 절리 침식 [정신] 전란의 불길을 딛고 재건한 사찰에 깃든 민초들의 숭고한 호국 정신




자연의 지혜와 독특한 기후가 빚은 맛의 절정,
순창고추장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기 전, 스승 무학대사를 만나러 구림면의 천년 고찰 만일사를 찾았다. 당시 인근 민가에서 맛본 칼칼하고 매콤한 별미를 잊지 못해 훗날 궁궐 진상품으로 지정했다는 이야기는 순창고추장의 깊은 내력을 알린 중요한 계기다. 조선 영조 임금 역시 이 특이한 음식에 반해 자주 찾아 먹었다는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전하며, 예부터 명성이 높던 이 한 사발의 장은 세월을 거쳐 겨레의 입맛을 매료시킨 대표적 식문화이자 민족의 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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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의 맛
순창의 장류가 독보적인 풍미를 자랑하는 비결은 자연이 허락한 기후 조건에 있다. 비가 적게 내리고 햇볕이 풍부하며,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자주 끼어 최적의 발효 환경을 조성한다. 한낮의 건조한 바람은 유해 미생물의 번식을 막고, 이로운 균이 항아리 속에서 풍부한 감칠맛을 내도록 돕는다. 신비로운 자연의 섭리와 전통 발효 기법이 어우러진 순창의 장맛은 고장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독보적인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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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자연의 섭리와
전통 발효 기법이 어우러진
순창의 장맛은 고장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독보적
자산이다.

”

거대한 암벽이 빚어낸 웅장한 드라마,
용궐산

화강암 덩어리가 커다란 용의 형상으로 꿈틀거리는 용궐산은 순창을 대표하는 명산이다. 옛사람들은 ‘용의 뼈’라는 뜻을 담아 ‘용골산’이라 불렀으나, 생동감을 불어넣고자 2009년 ‘용의 궁궐’을 의미하는 지금의 명칭으로 바꿨다. 산의 심장부인 ‘용녀암’ 절벽에는 공중에 걸린 듯 아찔한 명품 잔도, ‘용궐산 하늘길’이 펼쳐진다. 벼랑 끝에 발을 딛고 서면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과 눈부시게 푸르른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시야를 가득 채운다. 강물이 요동치는 두무소의 이무기와 지네가 승천을 두고 다퉜다는 옛이야기도 비경 속에 살아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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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지질 트레일
장군목 계곡 한가운데 위치한 요강바위는 강물과 자갈이 수만 년 동안 암반을 마모시켜 형성한 전형적인 포트홀(돌개구멍) 지형으로, 항아리처럼 움푹 파인 독특한 형상을 통해 뛰어난 지질학적 학술 가치를 드러낸다. 산허리를 돌면 나오는 용굴은 세월이 만든 화강암 틈새(절리)가 침식되어 생겨난 천연 석굴이며, 석문 사이로 비쳐 드는 햇살과 바위 결의 미세한 흔적은 섬진강 유역 지각 변화의 역사를 증명한다.

푸른 숲길 끝에서 만나는 천년의 불꽃,
강천사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는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강천산 자락에 도량을 세우고 강천사라 명명한다. 산세가 마치 용이 꼬리를 치며 하늘로 솟구치는 모양이라 한때는 '용천사'라 부르기도 했으나, 훗날 조선의 학자 송익필이 머물며 지은 시에서 유래해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가을날 불타는 듯한 붉은 단풍과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약 300년 수령의 모과나무가 자아내는 따스한 풍경은 여행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맨발 산책로, 깎아지른 절벽 사이를 잇는 현수교까지 어우러진 단풍이 천년 고찰의 정취를 한껏 고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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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의 정신
사찰 안마당에 서면 고려 충숙왕 시절 덕현선사가 세운 고풍스러운 오층석탑이 세월의 기품을 드러낸다. 조선 성종 때에는 신말주의 아내 설씨 부인이 강천사 중창을 위해 애절한 마음을 담은 권선문을 지어 올려 불사를 이끌었고, 훗날 임진왜란과 6·25전쟁의 불길 속에서 전각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으면서도 꿋꿋하게 다시 일어섰다. 모진 수난 속에서도 끝내 불도를 지켜낸 민초들의 호국 정신이 기와와 돌탑 사이마다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