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꽃이 만나는 곳 제주의 과학적 풍경 읽기
글. 편집실 사진. 한상무 작가
글. 편집실 사진. 한상무 작가
‘폭싹 속았수다’는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뜻의 제주 방언이다. 넷플릭스 시청 상위권을 기록한 이 드라마 덕분에 제주의 매력이 다시금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천혜의 자연경관과 향토 음식으로 사계절 내내 많은 여행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제주. 그중에서도 최근 주목받는 제주도 풍차 명소와 수국의 과학적 원리를 탐구해 보자.
제주도는 바람의 섬이다. 드넓은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는 육지와 달리 섬의 형태이니 태양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즉, 빠르게 뜨거워지고 빠르게 식는다. 주변 바다에 비해 열기를 더 많이 품은 공기는
위쪽으로 올라가고, 빈자리는 바다의 공기가 흘러와 채우는데 이것이 강풍의 기본적인 이유이다. 바람을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해줄 한라산은 중심부에 있고, 섬 자체가 대체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니
강풍을 감쇠할 지형마저 없다. 보통 제주를 두고 바람, 돌, 여자가 많은 삼다도(三多島)라고 칭하는데, 돌을 많이 사용한 것은 거센 바람 때문이었다. 돌담은 거센 바람을 막아주면서도 돌과 돌 사이가
비어 있어 바람의 저항을 줄일 수 있다.
‘바람 잘 날 없다’가 걱정이 끊임없다는 뜻으로 쓰일 만큼 바람은 때로 과거 삼국~조선시대 주민들의 삶은 물론 현재까지도 위기를 불러오는 골칫거리다. 실제로 제주는 연평균 풍속 3.8㎧로 국내 최고
수준 풍속을 기록하고 있으며, 태풍 통과는 연 2.6회에 이른다. 제주 해안 도로에 늘어선 나무들을 살펴보면 강력한 해풍 때문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 했던가. 최근 제주의 바람은 신재생 에너지자원으로 재탄생 중이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명소가 신창리의 풍차 해안 도로다. 제주공항에서 구엄리, 애월항을 지나 비양도를 넘어 서쪽
끝까지 다다르면, 해안 도로를 따라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거대한 바람개비처럼 우람하게 서 있는 흰색 타워들이 보인다. 푸른 하늘, 에메랄드빛 바다와 어우러진 거대한 회전날개가 바람의 강도에 따라
일정한 리듬으로 돌고 있는 장면은 웅장하기까지 하다. 특히 일몰 시간의 풍경이 일품이다. 풍차와 바다, 차귀도를 한 프레임에 담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과학 원리
돌담은 거센 바람을 막아주면서도 돌과 돌 사이가 비어 있어 바람의 저항을 줄여준다.
최근 제주도는 RE100을 달성했다. RE100은 모든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했다는 뜻이다. 지난 4월 제주도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4시간 동안 제주 전역의 전력을 재생에너지원으로 생산해 공급했는데, 심지어 소비량을 웃도는 바람에 잉여 전력을 육지로 보내기까지 했다. 재생에너지의 중심에는 단연 풍력이 있다. 제주에 처음 풍력발전이 도입된 곳은 서부 해안마을인 한립읍 월령리이다. 초창기에는 생태계와 어족 자원 훼손 우려가 있었지만, 별다른 피해가 확인되지 않으면서 점차 설치가 확산됐다. 현재 추자도 해상에 대규모 해상풍력발전 단지가 추가로 건설될 예정이다.
풍력발전기는 블레이드(발전기 날개), 증속기, 발전기, 타워 등으로 구성된다. 블레이드가 회전하면 운동에너지가 발생하는데 이를 발전기를 통해 전기에너지로 변환하는 원리다. 다른 에너지원에 비해 상대적 설치가 간단하고 비용이 저렴하며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 비용마저 점차 낮아지고 있다. 바람을 사용하기 때문에 환경 오염이나 자원 고갈의 염려마저 없어 신재생에너지 중에서도 빠르게 성장 중이다. 어쩌면 ‘바람 잘 날 없다’의 의미가 달라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바람이 쉼 없이 불면 에너지가 부족할 일이 없으니 말이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걷느라 얼굴과 등에 맺혔던 땀이 쪼르르 흘러내렸다.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걷느라 덥혀진 몸을 시원하게 식혀줬다. 고개를 들자 온통 물오른 여름이 보였다. 손으로 안아도 다 감싸지 못할 만큼 풍성하게 자라난 수국들이 수십 송이씩 겹겹이 쌓여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초여름 햇살처럼 환한 미소가 번졌다. 감탄하고 바라보고 파묻히기라도 할 기세로 꽃에 코를 가져다 댔다. 나른하게 물든 연분홍, 쨍하게 도도한 짙은 파랑, 속살은 하얗고 노랗다가 잎사귀의 끝이 살짝 푸르게 물든 그러데이션까지, 수국이 내놓은 빛깔은 하나에 머물지 않았다. 붉은 벽돌 건물, 나무로 만든 아치, 흰 담장과 흙길 아래에서 흐드러진 수국의 군락은 현재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게 했다. 이곳은 한국도 제주도도 아닌 수국의 왕국이라는 다른 공간이었다.
6월의 제주도는 수국으로 가득하다. 특별한 곳을 찾지 않아도 건물 정원, 탐방로 입구, 돌담장 아래에도 수국이 넘친다. 구좌읍 근처부터 시작해 월정리, 한동리, 평대리까지 15km에 걸쳐 펼쳐진 ‘김녕 수국길’, 제주도 동쪽에 위치한 ‘종달리 해안도로 수국길’은 드라이브하기 좋은 명소이며 100m 넘게 수국이 펼쳐져 있는 것으로 유명한 ‘마노르블랑’, 동백 명소로 잘 알려져 있지만 6월에는 형형색색의 수국 명소로 변신하는 ‘카멜리아힐’도 유명하다. 산방산, 한림공원, 남국사 인근에도 수국 명소가 있으며 다채로운 색감의 수국이 만발한 데다 풍성한 수국 한 송이를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답다니수국밭’ 역시 수국 애호가들 사이에서 입소문 난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수국은 ‘물을 좋아하는 국화’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수구화(繡毬花, 비단으로 수놓은 둥근 꽃)라고 한다. 수국의 가장 큰 비밀은 색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보통은 한 그루 나무에서는 특정 색의 꽃이 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수국은 한 뿌리 안에서도 밝은 연두색, 옅은 푸른색부터 짙은 파란색, 보라색, 옅은 자주색, 분홍색, 흰색 등이 공존한다. 게다가 올해 수국 나무에서 푸른 꽃을 봤어도 내년에 그 나무에서 같은 색이
핀다는 보장이 없다. 심지어 오늘은 푸른색이었어도 나중에 그 꽃을 다시 찾아보면 붉은색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수국은 일명 ‘흙의 리트머스 페이퍼’, 토양의 상태에 따라 색을 바꾸는 신비로운 식물이다. 그래서인지 수국의 꽃말에는 ‘변덕‘도 있다. 색이 바뀌는 것은 수국이 자라는 토양의 산성도 때문이다. 흙 속 알루미늄은 해당
토양이 산성일 경우 이온 상태로 존재하지만, 알칼리성인 경우 앙금 상태로 남는다. 수국이 산성 토양에서 자라면 알루미늄 이온이 뿌리를 통해 흡수돼 꽃 내부에 있던 델피니딘(푸른빛을 내는 안토시아닌의 일종인 색소)과
반응해 파란색이 발현된다. 반대로 알칼리성 토양인 경우 붉은색, 중성인 경우 흰색 꽃이 피게 된다.
제주도가 수국 명소로 이름나게 된 원인은 기후와 토양에 있다. 현무암이 풍화되며 만들어진 화산회토는 대체로 산성 토양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푸른 수국이 선호되다 보니 제주도는 수국 명소가 될 기본적 조건이 갖춰져
있었다. 여기에 비바람이 자주 내리는 기후도 한몫했다. 수국은 수분 유지가 어려워 금세 시들어버리는 ‘물 내림’ 현상이 심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금만 건조해도 꽃이 시들하고 색이 바래지므로, 높은 습기나 잦은 비가
필수적이다. 제주도의 수국이 또렷하고 산뜻한 색감을 자랑하는 것은 틈만 나면 비가 오는 아열대성의 습윤한 기후 덕분이다.
이렇듯 제주는 바람과 꽃, 그리고 그 속에 깃든 과학의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과 작은 입자들이 만들어낸 이 섬의 과학적 아름다움은, 자연을 이해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조용히
속삭여준다.
과학 원리
수국의 색이 달라지는 이유?
수국은 ‘흙의 리트머스지’라 불릴 만큼, 토양 상태에 따라 꽃 색이 달라집니다. 산성 흙에선 파란색, 알칼리성에선 붉은색, 중성에선 흰색 꽃을 피워요.